2011년 9월 26일 월요일

‘좋은’ 인플레이션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의 기사 '‘좋은’ 인플레이션'를 퍼왔습니다.

영산대학교 교수. 독일 브레멘대학교 경제학 박사. 네이버 파워블로거(http://blog.naver.com/saintcomf) 소스틴 베블런(Thorstein B. Veblen)과 조셉 슘페터(Joseph. A. Schumpeter)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진화경제학적 방법론'에 따라 자본주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제도경제학"과 "지식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학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란 멕시코 소장수들이 소에 물을 잔뜩 먹여 부풀린 후(inflate) , 무게를 많이 나가게 하여 팔아먹던 방법을 이르는 말이다.
실제론 100만원 밖에 안하는 소에 물을 먹이니 커 보이기도 하고 무게도 많이 나가니 150만 원 짜리 소로 보인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겉만 보고 150만원의 값을 치르고 이 소를 구매한다. 나중에 먼길을 몰고 온 후 오줌을 누이고 저울에 달아보니 100만 원 짜리 소의 무게에 지나지 않았다. 산 사람은 50만원을 손해 본 것이다.  대신 소장수는 가만히 앉아서 50만원을 덤으로 벌게 되었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의 결과다. 이 과정에서 부의 이동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부의 ‘재분배과정’이 폭력이 아닌 ‘시장가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인플레이션의 특징이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은 비윤리적이다.  그것은 ‘가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요즘 인플레이션에 대해 말이 많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의 ‘공공의 적’으로 되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그럴 만도 하지 않는가.
 인플레이션은 이처럼 멀쩡한 소득을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로 이동시키는데, 보유자산의 유형에 따라 부가 이동되기도 한다. 예컨대,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가나 부동산소유자, 곧 ‘실물재산’의 소유자는 인플레이션을 통해 이익을 얻게 되지만 임금으로 생활하는 ‘화폐자산’의 소유자는 손해를 보게 된다.
월급봉투에 적힌 임금숫자는 변함없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양과 종류는 크게 줄어들었다.  실질소득이 반 토막 나 버렸기 때문이다. 물가상승 전후의 장바구니를 비교해 보면 인플레이션의 뜻과 영향을 금방 알게 된다.
동일한 생필품과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이전에 비해 저소득층은 한층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내핍생활을 감당해야 된다. 명목임금이 오르지 않는 한 이로 인해 저소득층의 삶은 한층 힘겨워진다.
반 토막 난 나머지 소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불에 타거나 땅에 묻히지 않았으니누군가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어갔을 터이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기업이나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의 소유자가  ‘가격기구’를 통해 재분배해 간 것이다. 속임수도 없었지만 가격기구때문에  꼼짝없이 당하는 것이다. 실로 인플레이션은 합법적 약탈방식이요 칼 안든 강도질이다.
한번 등장한 인플레이션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독성은 다음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불균등하게 재분배된 소득으로 인해 계층이 분화된다. 이에 따라 계층별 소비패턴도 달라진다.
과잉소득을 보유하게 된 고소득층은 한편으로 과시수요와 낭비수요를 하게 된다.사회의 가용자원이 그러한 재화의 생산활동에 편중되니 저소득층의 생필품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가격은 등귀한다.
 다른 한편 그들은 과잉소득을 이용하여 주택과 같은 저소득층의 생필품산업에 ‘투자’(!)한다. 그 때문에 생필품은 물론 큰집, 작은 집 할 것 없이 가격이 다 오르고 전세비마저 폭등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을 낳아 결국 인플레이션이 증폭되는 것이다.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최후의 안식처를 앗아갈 정도이니 인플레이션은 참으로 비인간적이다.
그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되고 사회는 분열과 갈등의 질병을 앓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반사회적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치유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은 정말 그렇게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가?
인플레이션은 공급부족에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초과수요에 기인할 수도 있다. 그 원인이 어떠하든 인플레이션이 마냥 못된 놈만은 아니다.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인플레이션의 규모에 관해서는 경제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적당한 인플레이션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제가 불황이나 불완전고용의 균형에 처해 있을 때 인플레이션은 성장을 자극한다. 즉, 정부의 지출이 증대하면 물가가 상승하므로 생산자는 생산의 동기를 얻게 된다. 그 결과 고용이 늘어나므로 내수시장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인플레이션은 공공의 적이 아니라 진정한  정의의 사도로 된다.
 실제로 많은 나라들이 인플레이션과 공존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었다. 그래서 케인지언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을 공공의 적으로 항상 매도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니 인플레이션이 언제나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필요악’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나아가 ‘올바른’ 방법으로 활용하면  ‘진보적 발전’을 이루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약이 필요하고, 사회진보를 위해 ‘권력’과 ‘권위’가 필요한 것과 같다.
 실로 인플레이션은 양날의 칼이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결과는 달라진다. 지나치지 않고, 관리만 잘하면 나쁘지 않은 것이 인플레이션이다. 나쁘지 않은 인플레이션은 어떤 것인가?
 그로 인한 성장의 결과가 전 국민에게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분배되는 인플레이션이다. 나아가 반가치적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가치지향적 인플레이션이다. 그리고, 최소한 비바람을 막아 줄 집이나 생필품은 투기의 대상으로 되지 않는 인플레이션이다. 
 이제 우리는 공공의 적으로 지탄받는 ‘분배왜곡적’이며 ‘몰가치론적’이다 못해 비인간적이기도 한  나쁜 인플레이션을 지양하고 ‘분배지향’적이고 ‘가치지향적’이며 인간적인 인플레이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환율이나 효과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의 금융부담만 가중시키는 이자율인상보다 가치지향적이며 인간적인 인플레이션, 곧 ‘좋은 인플레이션’을 구상해 봄이 어떨까. 너무 구박만 하지 말고 인플레이션의 논의를 좀 달리했으면 좋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