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5일 목요일

"MB는 뼛속까지 친미·친일"... 치욕스럽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1.09.14자 기사 ' "MB는 뼛속까지 친미·친일"... 치욕스럽다'를 퍼왔습니다.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14]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춘원과 그 아류들
근 한 주일째 제 머릿속에 뱅뱅 돌면서 좀체 사라지지 않는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던지고 있는 내부고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문건 가운데 하나인데요. 구체적으로는 지난 2008년 5월 29일치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 전문(電文)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지난 9월 7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대화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원문은 Vice Speaker Lee said that President Lee was pro-U.S. and pro-Japan to the core so there should be no questioning President Lee's vision.)

이명박 대통령의 '친미·친일' 성향에 대해서는 그간 몇 차례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출생지(일본 오사카)와 에 실려 논란이 됐던 독도 관련 발언 등이 '친일' 관련이라면 '친미'는 이보다 한 단계 위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미국 외교관들이 이 대통령을 두고 "우리(미국)와 함께 헌신적으로 일하는 강한 친미주의자"(2009년 9월24일치), "사실상 모든 주요 문제에 미국을 지원하는 성향"(2009년 11월 5일치)을 지녔다고 평가했겠습니까? 

며칠째 제 입안에서 뱅뱅 돌며 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이상득 의원이 버시바우 대사에게 했다는 말 가운데 '뼛속까지'라고 한 단어였습니다. 천추에 사무친 원한도 아닌데 '뼛속까지'라니! 혹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원문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to the core'로 나와 있더군요. 인터넷 사전에 이를 검색해보니 '속속들이' 혹은 '철저히'로 나와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뼛속까지'로 번역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8년 4월 21일 일왕을 만나 깍듯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포착된 뉴스 화면 ⓒ 유투브 동영상 갈무리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상득 의원은 '일개 한나라당 의원'이 아닙니다. 이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자 발언 당시 그는 국회부의장이었으며, 대화 상대자는 주한 미국대사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대통령의 성향이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대통령과 관련한 이 의원의 발언은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하며 또 주한미국 대사가 거짓말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말에서 '뼛속까지'라는 표현은 흔히 골수에 박힐 정도로 심신에 깊이 각인된 상태를 일컫습니다. 즉, 목숨을 걸고 갚아야 할 만큼 깊게 사무친 원한이나 혹은 특정 이념이나 사상으로 무장된 '주의자(主義者)'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제 경험으로 봐온 역사인물 가운데는 골수 친일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더러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한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친일파 제1호' 김인승

'운양호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 뒤인 1876년 2월 4일. 강화도 초지진 앞 바다에 일본 군함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월 6일 일본 시나가와만을 출발해 부산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이 군함에는 구로다 일행이 타고 있었습니다. 구로다는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일본정부의 특사였습니다. 구로다 일행이 타고 온 군함에는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이 한 명 끼여 있었는데 그는 김인승(金麟昇)으로 명분상으로는 구로다 일행의 '통역'이었습니다.

친일파연구가 임종국은 이 김인승을 '친일파 제1호'로 지목한 바 있는데, 그는 구한말 조선의 관리 출신이었습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조선을 떠나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조선인 유민들의 자제를 가르치다가 일본인 첩자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앞잡이가 된 자였습니다.

김인승은 일본 외무성에 외국인 고문(顧問)으로 채용돼 '조선전도'를 그려 바치는 등 일제의 조선 염탐에 적극 협력하였는데, 그가 일본정부에 결정인 기여를 한 것은 구로다 일행을 도와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 협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행을 앞두고 구로다가 김인승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 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서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습니까?"

김인승은 '일본인의 입장'에 처하기 위해, 즉 일본인이 되기 위해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나서서 따르겠다고 구로다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 무렵 김인승은 이미 골수 친일파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대로 김인승은 구로다의 통역 신분으로 동행하였고, 구로다가 조선측과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군함에 머물면서 배후에서 '강화도조약' 체결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그는 용도폐기 돼 러시아로 되돌아가면서 편지 한 통을 남겼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역사 속에서 '친일파 제1호'라는 오명을 얻은 그가 배족(背族)의 대가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것은 멸시와 증오뿐이었습니다.
  
'창씨개명' 앞장선 친일파 춘원 이광수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제는 중일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조달 기지로 조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일제는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 주도자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다음달인 그해 8월부터 미나미는 '내선일체'라는 미명 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후 10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했으며, 12월에는 각급 학교에 일황의 사진을 배포해 경배케 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육군특별지원령 공포를 시작으로 5월에는 조선 전역에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했으며, 6월에는 근로보국대 조직을, 7월에는 전국 규모의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창립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그해 4월에는 조선어 사용금지를 골자로 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는데, 그간의  모든 작업은 결국 '창씨개명'을 추진하기 위한 사전 기초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씨개명 작업은 단순히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종국적으로는 징병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일본군 가운데 이아무개, 김아무개 등의 조선인 이름으로 불리는 병사가 섞여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 창씨개명 '나팔수' 춘원 이광수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1939. 12. 12) ⓒ 자료사진
그러나 창씨개명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컸습니다.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하였는데, 3월까지는 1.07%, 5월20일에 이르러서도 7.6%에 그쳤습니다. 결국 총독부는 관변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밀어붙이는 한편 친일파들을 앞세워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습니다. 
이때 가장 전면에서 창씨개명을 홍보한 친일인사는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한 춘원 이광수(李光洙)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 시행 그 다음날로 창씨계(屆)를 접수하고는 신문에 이를 권유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나인(중국인)과 혼동될 성명을 가지는 것보다 일본인과 혼동될 씨명을 가지는 것이 보다 자연스런 것이라고 믿는다.( 1940.2.20) …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 1940.9.4.)"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통해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며 일제가 바랐던 그 이상의 강도로 친일화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심지어 그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춘원을 두고 어떤 이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 심저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놀랍습니다.

'조선어 전폐론'을 주장한 친일파 현영섭

민족을 규정하는 3대 요인으로 흔히 말과 글, 역사를 듭니다. 즉 이 셋을 가진 민족이라야 제대로 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총독부는 일제말기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또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우리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이를 추진했으며 이는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총독부 관료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헌(玄櫶)의 아들로 나중에 친일파가 된 현영섭(玄永燮, 창씨명 天野道夫)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사회주의에 빠져 있던 그는 일본 체류 당시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잠시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로선 중대 시국사범인 그는 얼마 뒤 무죄로 풀려나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돌연 극렬 친일파로 변신했습니다. 그 무렵 그가 주장한 것은 놀랍게도 '조선어 전폐론'이었습니다. 그는 일어로 쓴 자신의 저서 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조선어를 존속하도록 허용하는 한 조선인적인 사상경향도 존속한다. 우선 조선어를 폐지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어를 폐지하라.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하도록 노력을 시키라.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야 한다. 조선인이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할 때야말로 조선인이 가장 행복해졌을 때이다.…  조선인이 정말로 일본인이 되려 한다면 우선 조선어부터 망각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 현영섭의 저서 ⓒ 자료사진
총독부 관료나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 주장하는 '조선어 전폐론'이라니. 그는 '조선적인' 것에 애착을 갖는 민족주의자들을 페스트에 비유하며 "자살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는 조선총독부로 미나미 총독을 찾아가 조선어를 폐지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했습니다.

미나미로서는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을 텐데 미나미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뜻밖에도 미나미는 '반대'였습니다. 현영섭의 요청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으나 미나미는 뜻밖에도 '조선어 전폐 불가론'을 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일어 상용(常用)을 강요해 민심이 좋지 않았는데 여기에 만약 조선어 전폐까지 들고 나올 경우 그 뒷감당이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나미는 '담화'를 통해 조선어 전폐 불가론을 정식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부하러 갔던 현영섭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조차 현영섭을 두고 "눈을 가리고 싶어진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방 후 신변에 위협을 느꼈던지 그는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김인승은 일본인이 되기 위해 '끓는 물, 타는 불 속'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춘원은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고 역설하고는 그런 연후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예언하였습니다. 현영섭은 조선총독도 부담스러워 하는 '조선어 전폐론'을 외치며 온몸으로 골수 친일파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뼛속까지 친일파'라고 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일'이라고 합니다. 실지로 이 대통령의 성향이 그러한지, 만약 그렇다면 그 정도는 또 어떠한지 저로선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주권국가의 대통령이 이런 사안으로 입에 오르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대통령 개인은 물론 국가로도 큰 치욕을 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제라도 과거의 언행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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