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0일 화요일

[경향의 눈]매뉴얼 불감증

이글은 경향신문 2011-09-19자 기사 '매뉴얼 불감증'를 퍼왔습니다.
사상 초유의 정전사태로 인한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순환단전이 단행될 당시의 상황이나 부실 대응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 국민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다. 보고 과정,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늦더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발전소를 세워두었다가 전력소비가 급증하자 허겁지겁 전기를 끊은 것이 이번 사태의 전말이다.

단전 조치의 적절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단전 당시의 예비전력은 애초 ‘340만㎾’로 발표됐다가 ‘148만㎾’로 수정된 뒤 3일 만에 ‘24만㎾’가 됐다. 발전소의 즉시 가동이 불가능한 허수 예비전력을 빼면 실제 예비전력은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 직전인 24만㎾에 불과했다는 것이 지식경제부의 1차 조사 결과다.



전기를 끊었던 전력거래소는 애초 매뉴얼상에 예비전력이 100만㎾ 이하일 때 단전하도록 돼 있다는 점 때문에 ‘과잉대응’ 혐의를 받았다. ‘관심-주의-경계-심각’의 4단계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채 ‘관심’에서 바로 ‘심각’으로 건너뛰어 전기를 끊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예비전력이 24만㎾였던 것이 사실이라면 과잉대응이 아니라 전국이 수일간 암흑천지로 변하는 재난을 막은 셈이 된다. 

매뉴얼 자체가 허수에 기반한 엉터리였으므로 매뉴얼대로 단계를 밟았더라면 더 큰 재앙을 겪을 뻔했다니 어이가 없다. 단전에 앞선 대국민 통지 따위는 아예 매뉴얼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매뉴얼이 없거나, 있어도 엉터리였거나, 제대로 된 매뉴얼이 있었지만 지키지 않아 큰 화를 부른 예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인재(人災)가 여기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매뉴얼을 우습게 알고 무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매뉴얼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에 매뉴얼을 갖추지 않거나 부실하게 만든다. 훈련도 형식적이어서 실제 상황에 돌입하면 당황한 나머지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다.

매뉴얼은 상황이 특정한 조건에 이르면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대응하도록 만든 행동지침이다. 감각이나 판단, 대응속도 등 개인차의 위험을 피하고 긴급 상황에서 누구나 최적의 대응으로 재난을 피하도록 만든 규칙이다. 이런 지침이 현실과 맞지 않는 엉터리라면 전기와 같은 국가 기간 인프라의 비상상황은 곧바로 재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매뉴얼’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삼성이 자동차 공장을 가동하기에 앞서 국내 회사에서 스카우트한 노동자들을 일본의 제휴사에 수개월 연수를 보낸 적이 있다. 이들이 회사에 낸 감상문 형식의 연수 보고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자동차 조립 라인의 노동자들이 하나같이 매뉴얼을 꼼꼼히 보면서 일하고 있어 처음에는 모두 초보자뿐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하거나 간단한 부품을 조립하는 사람들까지도 매뉴얼을 열심히 보는 것이 이상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A부품은 나사를 네바퀴 반 돌려 조립하고, B부품은 세바퀴 돌려야 한다’는 식의 유치한(?) 매뉴얼이었다. 하루에도 수백번 반복하는 단순한 나사 조이기를 그들은 마치 처음 하는 일처럼 매뉴얼을 보면서 했다. 한국에서는 일을 배우고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매뉴얼을 보지 않는다. 매뉴얼을 계속 보고 일하면 선배나 동료들로부터 “아직도 매뉴얼 보고 일하냐”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고 뒤처진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 자동차가 세계 최고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는 2만개가 넘는 부품으로 조립되는 데다 계속 굴러다니는 물체이다 보니 조립기술이 내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바퀴 반 돌리게 돼 있는 나사를 네바퀴나 세바퀴만 돌려 조립하면 꼭 탈이 나게 돼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헐거워져 고장이나 사고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매뉴얼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뉴얼을 뛰어넘는 상황을 맞거나 매뉴얼 시행의 주체가 부재할 경우 허둥대거나 혼란이 올 수 있다. 올 봄 동일본 대지진 때 재해 현장에서 안전 점검과 품목별 배분 등을 이유로 구호품 수송을 지체시킨 일본 당국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매뉴얼을 잘 만들고 매뉴얼을 충실히 따르는 것을 고지식하게 보거나, 웬만하면 매뉴얼을 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쳐주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때로는 임기응변이 훌륭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길게 보면 제대로 된 매뉴얼을 갖추고 이를 지키는 것이 사고를 막아 결과적으로 득이 된다. 비상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다. 선진사회의 ‘선진성’ 가운데 하나가 ‘매뉴얼대로’ 관행이 아닐까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