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7일 토요일

해직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4-04일자 기사 ' 해직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퍼왔습니다.
[미디어현장] 박성호 MBC 기자회장

해고된 이후 그렉 다이크(Greg Dyke) 전 BBC 사장의 회고록을 집어 들었다. 그 역시 ‘잘린’ 사람이어서 손이 갔다. 2003년 5월 BBC는 영국 정부가 참전 명분을 위해 이라크 정보 문건을 조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뉴스로 그는 블레어 정부와의 갈등 끝에 이듬해 1월 해임됐다.
그러자 영국 각지의 BBC 직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간지에 그를 지지하는 광고를 냈다. 사랑하던 일자리를 잃은 충격과 직원들이 보여준 뜨거운 반응에 그는  해임된 날을 ‘나쁜 날이자 좋은 날’이었다고 적었다.
나에게는 2월 29일이 꼭 그랬다. 다이크 사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의 해고 소식이 알려지자 기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피켓 시위에 집단 농성, SNS를 통한 응원. 차장급 이하 기자들 166명이 집단 사직을 결의했다. ‘박성호 기자가 돌아오지 못하면 우리도 떠나겠다’며. 다 초유의 일이었다. 내가 하룻밤에 백 통 넘는 문자를 받은 것이나, 선후배들로부터 생전 들을 일 없던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까지 포함해서. KBS, SBS, YTN, 조선, 중앙, 동아, 한국, 한겨레 등 언론계 동료들, 취재원들, 동창들. 광주, 부산, 중국, 영국에서도 위로와 응원이 이어졌다. ‘나쁜 날이자 좋은 날’이었다.
해고 이후 사람들은 ‘훈장을 달았다’, ‘계급장을 달았다’는 말을 건네 왔다. 대부분은 격려였지만, 개중에는 ‘언젠가 써먹을’(?) 경력 하나 생긴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남들이야 뭐라 말하건, 내가 보기엔 족쇄다. 해.직.기.자. 이 네 글자는 복직해서 퇴사할 때까지 죽 따라다닐 터이니. 용기 있는 언론인의 수식어로 붙을 수도 있다. MBC 저널리즘과 저항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언행이 그 타이틀에 값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평가대상이 되기 쉽다. 해직기자 출신이라 다르네?, 해직기자 출신이라더니 왜 저래? 하는. 그래서 해직기자라는 나의 ‘과거’는 ‘미래’를 보증 또는 억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곧잘 하게 된다.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MBC 노조의 1992년 파업 동영상을 유튜브로 봤다. 몇몇 선배들이 구호를 외치고 전단을 나눠주는, 짧게 스친 장면이 긴 여운을 남겼다. 지금은 파업에 불참중이고 노조의 ‘공적(公敵)’으로 지목된 분들이다. 과거에는 노조 간부였다가 세월이 흘러 누구보다 노조 탄압에 열을 올리는 경영진도 한둘이 아니다. 이 분들이 변한 건지 아닌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른다. 혹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선을 긋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산다면, 해직기자라는 나의 ‘과거’가 ‘미래’를 보증 또는 억압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복직을 전제로 앞날을 떠올려 본다. 1. ‘해직기자’라는 이름에 값하는 삶을 살 가능성 2. ‘해직기자’라는 이름만을 들먹이며 살 가능성 3. ‘해직기자’는 이력서상 항목일 뿐 세월에 맞춰 변모할 가능성. 그렇다. 훗날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해직기자라는 ‘과거’는 당당한 대답을 나오게 할 신분증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위의 2, 3번에 해당될 소지가 있다. 1번이 되려면? 지금도 날마다 지고 있는 ‘말빚’을 떼먹지 않고 갚는 게 아닐까 싶다. 공정 방송하겠다, 불편부당한 보도하겠다,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겠다, 아, 빚 갚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또 하나. “과거에 어떤 길을 걸었느냐보다, 지금 행동해야 할 때 어떤 길을 걷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한 후배의 이 말을 나의 ‘미래’를 향해 그물로 쳐놓는다.
해고된 지 한 달이 되던 날, 다이크 회고록을 다 읽었다. 머릿속에 ‘저항’ 두 글자가 남았다. BBC의 뉴스 편집진, 임원들에게 저항은 공영방송의 일상적인 가치였다. 그들은 정부도 일반 국민처럼 BBC에 압력을 가할 권리는 있지만, BBC가 저항하지 않고 굴복할 때가 문제라는 입장을 분명히 갖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이야말로 정치적 압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영원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곳이라고도 정의했다. MBC의 보도 책임자들이 떠오르면서 과연 같은 행성에 사는 사람들일까 싶었다.


박성호 MBC 기자회장.
압권은 이라크전쟁 보도에 관한 블레어 총리의 항의 서한에 다이크 사장이 보낸 답신이다. “총리님은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을 인정받기 위해 힘겨운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그 전투 상황이 보도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회에서 다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총리님의 견해에 찬동하지 않는 특정 기사에 대한 우려 때문에 BBC 전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입니다.”
뒤이어 감독기구인 BBC 경영위원회(현 BBC 트러스트)도 성명을 내고 총리실에 맞섰다. 김재철 사장과 방문진이라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보도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은 일선 기자들만의 몫도 아니고, 간부와 사장, 감독기구까지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해직 기자도 ‘별’ 달았다고 뒤로 물러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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