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2일 일요일

낡은 정치 그대로 남겨두고, 사퇴가 끝인가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2-10일자 기사 '낡은 정치 그대로 남겨두고, 사퇴가 끝인가'를 퍼왔습니다.
[기자칼럼] 친일·5공 청산 막던 박희태, 돈봉투 실체 밝혀야 진짜 '폐막'

“9일 박희태 국회의장(74․ 6선)의 퇴장은 전당대회에서 돈봉투를 뿌리던 구시대 정치의 ‘폐막’을 알리고 있다. ‘관행’으로까지 받아들여지던 일들이 이제는 삼권분립의 한 축인 ‘국회의 수장’마저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일명 ‘돈봉투사건’으로 사퇴한 박희태 국회의장을 두고 중앙일보는 ‘구시대 정치의 퇴장’이라고 바라봤다.
박희태 의장은 마지막 남은 민주정의당(민정당) 출신 정치인이다. 지난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총재이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발탁돼 정치인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민정당 후보로 정계에 진출했던 ‘상왕’ 이상득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도 불법 정치자금 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돼 사실상 정치적 생명는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의 지적대로 이제 낡은 시대 정치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듯하다.
민정당이 어떤 정당인가. 민정당은 그 이름과는 달리 의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잔학하기까진 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집권여당이었다.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학살로 막았던 '살인정권'이었다.
이후 민정당은 ‘3당야합’을 통해 민주자유당으로 변신, 김영삼 대통령을 배출한다. 비상식적인 야합에도 나름 자신을 민주화세력의 적자로 인식한 김 전 대통령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유일한(?) 공적을 세웠다.
검찰은 1995년 당시 전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는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로 전·노 전 대통령을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이후 여론에 밀려 다시 기소했지만 검찰의 행태는 상식에 기초해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야당은 대검찰청에 대한 법사위 감사에 김기수 당시 검찰총장를 불려내 크게 항의했다.
이때 김 총장을 감싸고 돈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던 박희태 의장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 박희태 국회의장 ©CBS노컷뉴스

동아일보는 “10일 밤 대검찰청에 대한 법사위 감사에서는 박희태 법사위원장이 김기수 검찰총장의 답변이 막힐 때마다 ‘답변’을 대신하거나 ‘한 수’ 지도하는 묘한 광경이 벌어졌다”며 “박 위원장의 ‘훈수’는 5·18문제를 국제법적 시각에서 접근한 조순형 의원의 질문에 대한 김 총장의 답변과정에서 절정을 이뤘다”고 전했다.
김 총장이 ‘전쟁범죄 및 반인도죄에 대한 소멸시효배제에 관한 국제협약’의 법적 효력의 묻는 질문에 우물거리면 박 위원장이 나서서 '정답'을 알려주는 식이었다.
이렇게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박 의장은 앞서 1989년 민정당의 대변인 신분으로 광주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5·18 단체들의 계란세례를 받기도 했다.
법사위원장으로서의 박 의장의 활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여야 의원 170명이 친일재산몰수를 명시한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발의했으나 박 위원장은 법사위에 법안을 상정하는 것조차 거부해버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0일 트위터에 “93년, 14대 국회는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제출해 친일파재산몰수를 시도했었습니다”며 “하지만 당시 국회 법사위 상임위원장이었던 당시 민자당 박희태 의원께서 상정을 거부해 논의조차 못하고 폐기됐지요… 돈봉투사건을 보며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봤네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시대의 낡은 유물을 청산하려는 움직임마다 온 몸으로 거부했던 박 의장이 돈봉투 사건으로 끝내 불명예 퇴진을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중앙일보의 지적대로 구시대 정치의 폐막을 알리는 서막일까.
구시대 정치가 진정으로 끝나려면 박 의장의 사퇴가 아니라 관행이라 일컬어졌던 돈봉투 사건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검찰은 지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 사건을 주도한 박 의장과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해 제대로수사해야 한다. 친이계 의원들의 갹출설 혹은 대선잔금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만큼 자금 출처도 명백히 밝혀내야 한다. “소핑백 크기의 가방에는 노란색 봉투가 잔뜩 들어있었다”고 했던 고승덕 의원의 폭로도 있었듯이 관련자들까지 모두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박 전 의장의 전 비서였던 고명진 씨의 ‘양심고백’으로 수사에 활력이 붙는 듯한 분위기가 잠시나마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이 수상하다. 그 수상한 낌새는 벌써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검찰이 벌써부터 이번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려는 액션을 취하고 있다. 한겨레에 따르면 검찰은 지난 주말에 고씨의 진술을 받아놓고도 박 의장 등에 대한 형사처벌 수위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적거리다 이제는 선처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다고 한다.
수사팀 관계자가 “박 의장은 총선에서 공천을 못 받아서 고개 푹 숙이고 있다가 당 대표 시켜준다니까 나선 것인데 (돈 봉투 사건에) 실제로 자기가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이거 가지고 기스(흠집) 나기는 억울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한겨레는 “이런 분위기 탓에 고씨의 자백과 언론보도, 그에 따른 박 의장의 전격 사퇴가 검찰과의 사전 교감 또는 조율에 따라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점차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까지 검찰이 보였던 정치적 행보를 가늠해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보수 신문들은 박 의장의 사퇴를 두고 '물러날 때를 놓쳤다'고 호통을 치고 있다. 조선일보는 10일 “박 의장은 옛 간판까지 내리면서 재출발을 하겠다는 친정집에 결정적 일격을 가하고 국회 역사에 현직 국회의장의 첫 불명예 사퇴라는 오명을 기록했다”고 비판했다.
박 의장이 고승덕 의원의 폭로 이후 즉시 사퇴했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사퇴 시기는 이번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공공연하게 불법 자금을 건네는 관행의 실체가 밝혀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구시대의 정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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