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3일 목요일

[기고]지식채널e '구럼비'편 불방...'돌'얘기도 못하는 시대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2-23일자 기사 '[기고]지식채널e '구럼비'편 불방...'돌'얘기도 못하는 시대'를 퍼왔습니다.
"아무리 납작 엎드려도 EBS에 떡고물은 없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방송예정이었던 지식채널e '구럼비' 편이 불방됐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처럼 "아니 왜?"라며 의아해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단 불방을 결정한 심의실이 밝힌 바에 따르면 구럼비 편을 불방 시킨 핵심 이유는 '공정성' 때문이다. 즉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은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인데, 이 때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쪽의 의견에 치우쳐져 있다는 말이다. 

'자연 다큐'가 왜 '시사 다큐' 됐나?

그러나 담당PD가 스스로 밝혔듯이 사전에 '자기 검열'하여 사안을 '해군기지 건설'이라고 하는 논쟁적인 틀로 다루지 않고, 대신 '구럼비'라고 하는 '돌'의 '지질학적 가치'라는 틀로 제작했다. 즉 지식채널3 구럼비 편의 경우 어차피 시사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에 양쪽의 인터뷰를 담는 식의 방법을 취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자연 다큐'로 접근하여 일반적인 환경 프로그램 수준의 상식적 메시지를 전하자는 측면에서 제작됐다. 그러니까 "이렇게 희귀하고 소중한 구럼비 바위를 굳이 훼손해야 하겠는가?" 정도의 메시지로 프로그램을 완성한 것이다. 

'구럼비'편이 정치적으로 과연 누구에게 득이 되고 또 누구에게 실이 될지 저는 관심없습니다. 또 관심 둘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EBS가 그동안 프로그램으로 구현해온 가장 상식적인 판단 기준만이 있었을 뿐이고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지식채널e '구럼비'편 김한중 PD

결국 '돌 얘기'를 한 '자연 다큐'를 오히려 심의실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시사 다큐'로 오독했다고 밖에는 해석이 되질 않는다.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정치적 사안을 피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심의실은 그걸 다시 정치적 사안으로 끌고 들어와 해석을 했다는 말이다. 

'자연 다큐'는 '비판적 시각' 담으면 안 되나?

물론 아무리 연출자가 그렇게 비껴간다고 해도 프로그램의 '뉘앙스'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긍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이 정도의 비판적 시각은 '환경 스페셜'류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는 매우 보편적인 시각이다. 특정 정치세력이나 특정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정권 하에서라도 상식적으로 할 수 있는 '자연을 보호합시다!'라는 수준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김한중PD 트위터(@EBSKIMPD) 20일 오후 8시45분에 방영 예정이었던 지식채널e '구럼비'편은 방송부적합으로 결정돼 불방됐다. (사진=김한중PD 트위터 캡쳐)

물론 EBS는 힘이 없는 방송사이자 정치권의 호통 한마디에 쩔쩔 매는 방송사다. 지배구조에서부터 재원구조까지 어느 하나 독립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몸을 사리고, 납작 엎드리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이처럼 '자연 보호'라고 하는 당위적 가치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혹여나 현 정권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 또 걱정이다. 나 역시 EBS의 구성원이기에 그 어려움을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이건 도를 지나쳤다. 이건 단지 납작 엎드리는 수준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교육 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것이다. '탈정치'적이어야할 교육 방송을 오히려 '정치적 방송'으로 해석해 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올바른 가치를 향해 '적극적 균형'을 잡으라고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돌' 얘기를 하는 걸 가지고 '기계적 균형'이 안 맞으니 방송하지 말아라? 과연 누가 EBS를 정치화 시키는가? 

정권 바뀌기만을 기다린다면 언론은 '자립 의지' 잃어버릴 것

비단 이러한 일이 EBS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타 방송사들도 유사한 이유로 수없이 많은 불방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고 한다. 4대강 사업의 '환경적 문제'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이걸 '4대강 사업의 찬반'으로 해석해서 불방시키는 것이 아마 가장 트렌디(?)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정말 그러한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4대강 사업'은 '환경 파괴적 사업'인가? 4대강 사업에 찬성을 하든 찬성을 하지 않든 '환경 보호'라는 것은 어차피 양측 모두가 다 지켜내야 할 가치가 아닌가? 구럼비 바위 역시 마찬가지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는 쪽도 구럼비 바위의 지질학적 가치를 보호하려고 애써야 하지 않는가? 해군기지가 '환경 파괴적' 사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고승민(경일대 4) 제공 지식채널e '구럼비'편에서 다루고자 했던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현실 그 자체보다도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언론의 현실에 대해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우리 언론인들 스스로의 모습이다. 물론 현 정권의 집요한 언론장악 속에 아마 많은 이들이 지치고 또 지쳐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돌'얘기 하나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 진짜 도를 넘어선 것이다. 만약에 이걸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간다고 하면, 또 오로지 총선 이후 정권이 교체되기만을 기다린다면 언론은 스스로의 '자립 의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정치권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의 생존여부, 비판 여부를 결정하는 '기생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체화하게 된다. 

"아무리 납작 엎드려도 EBS에 떡고물은 없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나꼼수, 뉴스타파 등을 비롯한 새로운 채널들의 등장으로 기성 언론은 사실 더 떨어질 곳도 없을 만큼 초라해져 버렸다. 정의롭지도 못하고, 용감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똑똑하지도 못하다. 언론밥만 축내는 떨거지가 되어 매일매일을 궁시렁대며 연명해 간다. 이는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나 역시 그렇게 밥만 축내는 언론 떨거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무리 떨거지라고 해도 언론인은 언론인이다. 정치권과 붙어먹기를 작정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최소한 '돌 얘기' 정도는 마음껏 할 수 있는 수준을 지켜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EBS 심의실을 비롯한 경영진은 알아뒀으면 한다. 아무리 납작 엎드려도 EBS에 떡고물 같은 것이 떨어질 일 없다. 그리고 납작 엎드리면 엎드릴수록 더 밟고 싶어 하는 것이 권력이다. 그나마 돈 없고 빽 없는 EBS가 기댈 곳은 시청자밖에 없다. 근데 '구럼비'편 불방하면 시청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나? 시청자들이 "야, 구럼비 편 불방하는 EBS는 참 멋지다!" 라고 해주나? "구럼비 편 불방한 EBS에게 수신료 한 푼이라도 더 줘야겠다!"라고 시청자들이 생각하겠나? "구럼비 편 불방한 EBS는 참 '교육적'이니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겠다!"라고 학부모들이 환호하겠나? 이에 대해 부디 '정치적'으로 고민해 보길 권한다.

김진혁 E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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