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FTA와 인민주권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1-11-23일자 기사 'FTA와 인민주권'을 퍼왔습니다.

철학, 경제학, 정치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입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FTA 비준 안건을 기습상정하고 결국에는 한나라당 단독으로 안건을 처리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금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정상적인 공론화 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을 건너뛴 이와 같은 ‘날치기’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FTA 비준은 현실로 닥쳐왔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FTA 협정이 현실경제에 미칠 충격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FTA로 인해 초래될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쏟아내었다. 가공할만한 일들이 금새 대한민국에 닥칠 것만 같다. 그러한 우려들 중 국회에서 쟁점이 된 ISD 조항에 관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정 반대로 (으레 그랬듯이) 재계와 친정부 성향의 연구소들은 FTA가 가져올 긍정적인 경제효과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실제로 FTA가 국민경제에 어떤 충격을 가할 것인지, 긍정적 측면이 클지, 부정적 측면이 클지, 사전에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일단 초보적인 정치공학의 수준에서 진보파들이 FTA에 반대하고 보수파들이 FTA 찬성한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또 다른 시나리오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것이다. 만일 실제로 FTA 이후 그다지 더 나빠지지도, 그다지 좋아지지도, 어느 쪽도 아니라면 어떨까? FTA에 대한 장밋빛 전망도, 혹은 그것이 초래한 ‘파국’에 대한 종말론적 상상력도, 어긋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문제를 좀 더 에둘러서 고찰하자. 우선 보수파들은 FTA를 정치논리가 배제된 순수한 자유무역, 내지는 통상개방 협정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 때문에 FTA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식이 된다. 그러나 장하준이 최근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실질적으로 “이미 ‘자유무역’을 하고 있다.”[11월 7일자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이미 산업 일반에 ‘무역장벽’이라고 할 정도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며, 그런 상황에서 관세인하 및 철폐조치가 어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FTA로 인해 일부 수입 소비재 품목의 관세가 인하된다면 일반적으로 소비자의 효용이 증대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원론 수준에서 그와 같은 것이 ‘모범답안’이다. 그러나 관세인하 효과가 실제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수준에 얼마만큼 반영될지는 미지수이다. 한-칠레 FTA 협정 이후 칠레산 포도주의 소비자 가격이 실제로는 관세인하 효과만큼 하락하지 않은 것이 좋은 사례이다.[경향신문, "칠레 와인에 'FTA 단맛'은 없었다"] 그리고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수준’이란 오히려 공공요금과, 교육비, 그리고 부동산 가격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임박한 공공요금 인상 계획을 목전에 두고서, 그리고 전세난과, 미친 등록금에 시달리는 국민들 앞에서, 앞으로 미국산 쇠고기와 칠레산 와인 따위로 인해 엄청난 혜택을 누릴 것이라는 둥의 호언장담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미국측의 관세인하로 인해 우리의 주력 수출업종인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 분야에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조업이 가격경쟁력으로만 해외시장에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관세인하의 효과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일례로 미-일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에게 유리한 환율조정을 시행했음에도 제조업 부문의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개선되지 않았다. [중앙일보, "플라자 합의, 그 후 20년"] 더 나아가 미국시장에서의 수출의 증가가 가시화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민경제에 (이를테면) ‘고용창출’과 같은 구체적인 경제적 효과로 이어질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지난날의 경험에서 알듯이) 매우 불확실하다. 대기업들의 수출호황 속에서도, 실제로는 중소기업 종속, 양극화, 실업문제가 심각해졌던 것이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위와 같은 사례들을 열거한 이유는, FTA의 구체적인 ‘경제효과’라고 추산된 것이 실제로는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거듭해야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경제학의 현실예측력은 이와 같이 보통의 실험과학의 예측능력에 전혀 못미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사항이다. 그러나 내가 에둘러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예측능력이 가진 이러한 맹점들은 FTA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시나리오들에도 그대로 해당된다는 점이다.
  우선 우리는 FTA로 인해 당장 공공 서비스의 체계가 붕괴할 것이라든가, 한국시장이 미국자본에 의해 잠식될 것이라든가, 국가의 주권이 마비되고, 당장 미국식 민영 의료보험 시스템을 수용해야하는 따위의 암울한 미래를 미리 단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실제로는 희박하며, (정부의 장밋빛 전망들과 마찬가지로) 중남미에서 일어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한반도에서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거듭해야 성립하는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 일례로, ISD 투자자-국가소송제가 실제로 국가의 주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으며, 국가의 공적인 역할과 관련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쟁점들을 제기하는 것은 확실하다. [http://foog.com/11386/] 그러나 그것이 활용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국가의 공공 시스템과 정책 그 자체를 직접 ‘겨냥’한 사례들을 찾아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ISD의 판정 기준은 '합리성과 비례성'"] 말하자면 실제로 ISD 제도 하에서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 특정 국가의 공공 시스템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경각심을 조성하기 위해 공언한 최악의 가정들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만일 FTA가 가져올 (우리가 짐짓 우려했던) 파국과 참상들이 실제 현실로 닥친다면, 일부의 자조 섞인 푸념처럼, 희망을 버리고 ‘이민’이라도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냉소적인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누구도 순수하게 FTA 때문에 이민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FTA 조약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되짚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물음이다. “오히려 FTA 조약 비준 이후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우리가 지금까지 매우 익숙하게 여겼던, 말하자면 ‘오래된 미래’가 아닌가?” 이를테면 FTA의 핵심 중 하나는 외국인 투자의 자유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점진적으로 투자의 자유화, 자본시장의 개방을 거쳐왔다. 현 정부와 한나라당이 유독 이번 FTA 문제에 관해서 ‘매국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이미 진행된 개방조치[ex, 자유경제지구]들은 과연 ‘애국적인’ 것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사회의 구조가 재편되었던 것은 ‘참을만 했고’ 지금 한나라당 정부 하에서 동일한 일이 새삼스레 재연되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 물음을 어떤 냉소적인 의도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작금의 반FTA 투쟁에 있어서 진정한 ‘적’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투쟁의 ‘대의’는 무엇인지를 제대로 사고하고 싶을 뿐이다.
  서툰 정념의 분출은 정치적으로 불모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를테면 FTA가 비준된 지금 이 시점에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재연하는 것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그것은 FTA가 이미 비준되었으니 싸움은 [적어도 다음 총선과 대선까지는] 사실상 끝났다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진보대연합’에 의한 ‘집권’ 뿐이라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사실상의 ‘패배주의’이다. [실제로는 장지연 선생도 친일로 돌아섰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작금 FTA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부터 지속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연장선 상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권리와 주권을 대주주들, 대기업 및 재벌, 기술관료들에게 하나 둘씩 넘겨주었고, 이번의 FTA도 우리가 겪어야 할 굴욕의 마지막은 결코 아닐 것이다. FTA는 오히려 싸움의 새로운 라운드가, 이미 반복되었던 싸움의 장이 다시 갱신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일부가 주장하듯 FTA 통과 이후 당장 나라가 망하거나 서민의 삶이 끝장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 어려웠던 딱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들이 특정 정치인에 열광하거나, 반대로 욕설을 쏟아낸 적은 있어도, 자본과 의회권력을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통제했던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반복하자면, FTA가 가져올 결과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그것이 우리들의 미래와 우리들의 ‘주권’을 판돈으로 내건 ‘도박’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도박에는 분명 확률상으로 유리한 도박과 불리한 도박이 있다. 그러나 FTA가 어느 쪽의 도박인지와 무관하게, 그것이 소수의 몫을 위해 보통 사람들의 삶, 권리, 재산을 한 ‘밑천’으로 삼은 도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의 ‘날치기’ 국면에서 우리들이 세워야할 원칙은 분명하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그것은 ‘당신들의 도박에 우리의 미래를 담보로 삼지 말라’는 원칙이다. 자본의 이해를 배후에 둔 무수한 관료들, 전문가들이 국민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FTA 정국 때나 그 이전이나 한결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 똑똑하고 유능한 우리들이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러한 허황된 수사를 한꺼풀 벗겨내면 결국 앞서 말한 ‘도박꾼’의 논리가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하면 된다, 자신감을 가져라!”고 외친 김문수의 저 발언도 동일한 최악의 도박꾼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셈이다. 그리고 저러한 수사가 붕괴할 때 보통사람들이 마주쳐야할 가혹한 현실이 무엇인지는 이미 지난날의 금융위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FTA와 관련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저 “기술관료의 언어로 말하는 자본”에 대항해서 인민주권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싸움의 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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