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9일 토요일

[사설] 교육과정 바꾸면 될 일을 왜 꼼수 부리나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1-18일자 사설 '[사설] 교육과정 바꾸면 될 일을 왜 꼼수 부리나'를 퍼왔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내년 1월에 한다던 중학 역사교과서 검정기준을 엊그제 발표했다. 집필기준에서 삭제했던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들, 즉 4·3항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과 친일 청산 과정을 충실히 기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일단 반걸음 뒤로 물러선 모양새다.
수구언론과 관변학자를 앞세워 정권 멋대로 역사교과서를 재단하려다 학계와 역사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저지른 일에 들러리 서다가 뒤늦게 설거지꾼으로 나선 국편의 꼴이 처량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봉책으로 내놓은 검정기준이란 게 실효성이 없는데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요 사건에 대한 기술은 100점 만점에 25점이 배정된 ‘교육과정 준수’ 항목의 여러 심사요소 가운데 하나다. 의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지만 일단 배점이 유명무실할 정도로 적다. 또 최고 규범에 해당하는 개정 교육과정은 일제의 식민지배나 독재를 합리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즉 이승만·박정희 독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불가피했다거나, 식민지근대화론의 연장에서 친일을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위 요소인 검정기준으로 상위(교육과정), 차상위(집필기준) 규범을 뒤집을 수는 없다.
개정 교육과정은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쓰도록 했고,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대한 기술을 삭제했으며, 사실과 다른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를 강제하도록 했다. 학계가 원천적으로 문제 삼은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왜곡된 상위, 차상위 규범은 그대로 둔 채 맨 밑의 검정기준만 손질해서는 바뀔 게 없다. 집필기준이 민주화나 독재의 구체적 사건과 요소를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도록 한 것도 결국 교육과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과부와 국편은 집필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근대사 부분 집필기준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의 사건을 명시해 기술하도록 했다. 지금까지의 무리수와 꼼수를 호도하려는 거짓말일 뿐이다.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을 학계에 온전히 맡겨 다시 개정하는 수밖에 없다. 학계와의 무모한 역사전쟁을 그만두기 바란다. 당장은 체면을 구기겠지만 역사와 교육을 농단한 정권으로 청사에 남는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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