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전기료 왜곡, 전력대란 또 부를 수도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 2011-11-01일자 기사를 퍼왔습니다.
[국내 이슈]9·15 정전 사태 뒤 전력상황 분석

류이근  경제부 기자

단전 가구 1415만 호, 미사일 기지와 최전방 GOP(일반 전초) 등 군부대 124곳 정전, 중소기업체 5775곳 단전 피해, 승강기 정지 및 긴급구조 1902건, 개인 병원 7곳 수술 중 정전 발생 피해, 축사 및 양식장 피해 10건, 신호등 정지로 인한 교통혼잡 2877건, 현금자동인출기 정지 및 은행의 업무 마감 지연 417건….
지난 9월15일 초유의 정전 사태로 발생한 피해다. 정부 합동조사단은 지난 9월 말 이번 사태의 핵심 원인이 수요 예측 및 공급 능력 판단의 실패와 전력 당국의 부실한 대응에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식경제부 공무원을 비롯해 한국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의 임직원 등 17명을 문책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스스로 청와대에 사표를 냈다.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한편으로 수요 예측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재정비하면 충분한 걸까? 이와 관련해 전력산업연구회는 지난 10월14일 ‘9·15 정전사태와 전력산업 구조개선 방향’이란 제목의 세미나를 열었다. 흥미로운 건 이 자리에 참석한 전기 및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전 사태가 일시적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고, 그 구조적 문제엔 ‘잘못된 가격신호’가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 사실이다.
세미나 발제를 맡은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전기요금의 인상 수준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을 훨씬 밑돈 반면, 고유가로 석유·석탄·가스 등의 가격이 급등하면서 다른 에너지에서 전력으로 수요 전환이 물밀듯이 발생했다. 이로 인한 전력 수요 급증이 9·15 정전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손 교수와 다른 토론자들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번 사태는 ‘낮은 전기요금→전력 수요 증가→전력 공급 기반 약화→순환 정전’이란 도미노의 결과물이다.
이번 정전 사태를 계기로 전기요금을 둘러싼 4가지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자.


지난 9월15일 일어난 사상 초유의 정전 사태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수 있다. 상당수의 가구가 정전된 서울 여의도의 한 아파트 단지 모습.

정치적 결정에 따라 왜곡된 전기료 체계
전기는 필수 재화다. 따라서 그 가격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공공요금이니만큼 가격 결정권은 정부의 손에 달렸다. 정부는 국민의 물가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 아래 물가가 들썩일 때마다 전기요금 인상을 억눌러왔다. 이런 현상은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과연 고맙기만 한 일일까?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40%에 이른다. 그런데 같은 기간 전기요금은 18.5% 상승했다. 지난 19년 동안 물건과 서비스의 가격이 1천원에서 3400원으로 올랐는데도, 전기요금만은 1천원에서 1185원 인상에 그친 셈이다.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전기요금은 이 기간에 65.1% 하락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기요금 인상률은 다른 공공요금과 비교해도 크게 낮다. 버스와 지하철 요금의 경우 비슷한 기간(1984~2010년)에 각각 750%, 450% 인상됐다. 손 교수는 “정부가 전기요금을 정치적으로 결정해 전력시장에 정확한 가격 시그널(신호)을 주지 못해 공기업 적자를 확대시키고 전력의 공급 기반을 약화시킨 점은 큰 정책적 실패”라고 주장했다. 전력 및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가 선거를 의식해 전력 요금을 계속 동결하거나 찔끔찔끔 인상해오면서 가격체계가 크게 왜곡됐다고 말한다.
정치에 희생된 전기요금은 경제 상식마저 깬다. 전력을 팔면 팔수록 손해인 전력산업의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기의 원가보상률은 2006년 이후 계속 100%를 밑돌고 있다. 2008년엔 77.7%로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1천원을 받아야 밑지지 않는데 777원을 받고 전기를 팔았다는 말이다.

싼 전기료 덕에 초과 이윤 누리는 대기업
공급자인 한전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전기를 팔면, 수요자가 이득을 보기 마련이다. 그만큼 싼값에 전기를 사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혜택을 수요자가 모두 똑같이 누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바로 전기요금 체계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심야전력을 뺄 경우 산업용, 주택용, 농사용, 교육용, 가로등, 일반용(5가지 종별 외 사용자) 등 6종의 요금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들 종별 원가와 판매가가 다 다른데, 지난해 기준으로 산업용의 원가보상률은 89.4%에 불과했다. 즉, 산업용 전력을 쓰는 약 35만 개 업체들은 원가 1천원짜리 전력을 평균 894원에 쓰는 것이다. 심야를 뺀 주택용 원가보상률 94.2%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인 셈이다.
실제 산업용 전력 사용량은 지난해 전체 사용량의 절반이 넘는 53.6%에 이르지만, 판매 수익은 전체 37조3900억원의 47.7%(17조8306억원)로 나타났다. 수요자들이 전체적으로 싼값에 전기를 쓰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국민이 더 비싼 값에 전기를 사서 쓰면서 산업계를 지원해주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100이라고 할 때 일본은 26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은 184나 된다.
혜택은 산업계 안에서도 특히 대기업에 집중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산업용 전력의 총괄원가 미달에 따른 기업별 수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력 사용이 많은 대기업 200곳이 전체 산업용 전력의 무려 42.3%를 썼다. 이들에게 돌아간 수혜 금액은 산업계 전체인 2조1157억원의 46%가 넘는 9832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전력 사용량 상위 5개 업체인 삼성전자(1위), 현대제철(2위), 포스코(3위), LG디스플레이(4위), 하이닉스(5위)의 수혜 금액만 3265억원에 이른다.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은 과거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의 산물이다. 기업 처지에서는 비용에 해당하는 전기요금을 낮추면 수출할 때 가격경쟁력이 생긴다. 이런 산업정책 아래 수출 대기업들은 원가보다 훨씬 낮은 금액에 전기를 쓰면서 초과 이윤을 누려왔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과거에 비해 가격경쟁력보다 품질 경쟁이 중요해지고 있어 전력요금 인상이 산업체의 국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고 있다”며 “또한 낮은 전기요금은 기업체들의 에너지 절감 노력을 반감시켜왔다”고 지적했다. 

싼 전기료는 결국 국민의 희생 요구
우리나라의 산업용과 주택용 전기요금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공급자인 한전은 해마다 큰 손실을 보고 있다. 한전은 2008년 사상 첫 3조원(당기순이익 기준)의 적자를 기록한 이후 3년 연속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올해도 약 2조원의 영업 적자가 예상된다. 한전의 차입금은 2008~2010년 17조3천억원이 늘었고,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87.3%에서 140.1%로 급증했다.
한전의 손실이 한전 주주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소비자인 국민에게 ‘희생의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2008년 추경예산에서 8350원을 떼서 한전의 손실을 일부 보전해줬다. 국민이 낸 세금을 한전에 곧바로 투입한 것이다. 한전은 상장회사이긴 하지만 정부가 최대주주로 지분 51%를 지녔다. 따라서 손실이 나면 우선 자체 구조조정 등 경영합리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이마저 안 되면, 결국 정부에서 수혈을 받아야 한다. 
전력산업의 적자가 지속되면 최소한의 투자 재원 조달마저 어렵게 된다. 이로 인해 낙후된 전력산업은 모두에게 다양한 형태의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강승진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지금 우리가 전기를 싼값에 쓰는 대가를 5~10년 뒤 후대 사용자들이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이 거의 없는데도 에너지 소비만큼은 산유국 부럽지 않게 펑펑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전력소비량은 OECD 평균의 1.7배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4월 세계경제전망(WEO)에서 “한국은 1인당 실질 GDP가 1% 증가하면, 1인당 에너지 소비 또한 거의 1% 증가해왔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인당 전력소비량은 우리 국민소득의 거의 2배인 일본을 추월했다. 또 지난해 전력사용량은 무려 10.1% 늘었다. 지난 10년 평균 증가율은 5.5%에 이른다.

에너지 다소비 경제 부추기는 전기료 체계
정한경 선임연구위원은 “전기요금이 기름값보다 비정상적으로 싸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2차 에너지인 전기가 1차 에너지인 기름과 가스보다 되레 저렴하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기준으로 에너지원별 가격을 비교해보면, 소비자가격과 발열량, 열효율 등을 고려한 난방용 등유와 경유의 가격이 전기요금보다 각각 25%, 63%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전기요금이 기름값보다 50% 정도 비싼 편이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이 싸다 보니 1차 연료에 대한 대체 소비가 전기로 몰렸다. 이 때문에 전체 전력 수요의 24%에 이르는 전기난방 수요가 2004년보다 곱절 가까이 늘어났다.
기름과 석탄, 가스 등을 때어 전기로 전환할 때 투입 에너지의 약 60%가 손실된다. 따라서 우리의 전력산업 구조는 비싼 1차 에너지를 사다 애써 전기로 만들어 싼값에 공급하는 기형적인 모양새다. 싼값 때문에 전력 소비는 해마다 크게 늘어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해외에서 매년 더 많은 석유와 석탄, 가스 등 1차 에너지원을 비싼 값에 수입해온다. 그만큼 전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2008년의 경우 에너지 수입액이 무려 1400억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나라의 선박·자동차·반도체·철강 부문 수출액을 모두 합한 금액에 버금간다.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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