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일요일

필리핀, 대만, 태국…핵마피아, 군침을 흘린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23일자 기사 '필리핀, 대만, 태국…핵마피아, 군침을 흘린다'를 퍼왔습니다.
핵안보정상회의 대항 국제포럼서 폭로된 '검은 음모'

26일 시작되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 의제 '핵테러로부터의 안전'에 맞서 '핵으로부터의 안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 진영의 움직임이 먼저 시작됐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이 지난달 꾸린 핵안보정상회의 대응행동은 22일 오후 서강대에서 핵안보정상회의 대응 국제포럼을 열었다. 이 포럼에서는 일본 후쿠시마(福島) 사고 이후 원전의 위험성이 새롭게 부각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온 반원전 활동가들이 각국의 원전 실태와 반대 움직임을 상세히 소개했다.

■ 필리핀, 27년 역사의 '웰강 바얀'은 멈추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온 반핵 활동가 에밀리 델라 크루즈에 따르면 필리핀 반원전 운동의 역사는 19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수천 명의 대규모 거리 시위대가 수도 마닐라에서 서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바탄(Battan) 원전의 가동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그후 '웰강 바얀'(Welgang Bayan, 총파업이라는 뜻의 타갈로그어)으로 불리며 필리핀 반원전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크루즈는 바탄 원전이 과거 필리핀의 독재정부였던 마르코스 일가가 휘두른 권력과 부패의 한 단면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내에서도 안전 관리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던 기업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이 세운 바탄 원전은 초기 공사비용 6억 달러가 나중에는 23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그 차액은 대부분 마르코스 정권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의 국가 부채 20%가 원전 대금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국민들이 30년 동안 하루 평균 15만5000달러씩 갚아나가야 하는 수준이었다.

환태평양 지진대인 '불의 고리'에 들어가는 필리핀에서 바탄 원전이 위치한 곳도 지진에 취약한 곳이었다. 부패한 정부와 탐욕스러운 '핵 마피아'의 결탁이 국민에게 빚을 전가하고 환경과 인명을 위험 속에 빠트린 셈이다.



▲ 1985년 필리핀 반원전 시위 장면. ⓒ핵안보정상회의 대응행동

시위가 이어지면서 바탄 원전은 1986년 결국 문을 닫고 현재는 관광명소가 됐지만 필리핀 정부의 원전 부활 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008년 아로요 정부 당시 필리핀 상원과 하원에는 바탄 원전의 즉각적인 재가동을 가능케하는 법안이 각각 제출됐다. 그해 11월 필리핀 전력공사와 한국전력공사(KEPCO)사이에 바탄 원전의 재가동과 관련한 타당성 조사를 의뢰하는 양해각서(MOU)가 채결된다. 이듬해 12월 필리핀 전력공사는 한전이 바탄 원전의 재가동이 가능하다는 조사 결과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이러한 국회의 움직임은 제2의 '웰강 바얀'을 불렀다. 바탄 원전의 악몽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다시 빠르게 뭉쳐 거리로 나섰고 국회는 결국 회기 중 법안 처리에 실패한다.

2010년 아퀴노 정부가 새로 들어섰다. 베니그노 아퀴노 대통령의 모친 코라손 아퀴노는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1986년 대통령에 당선돼 바탄 원전 가동을 중단시킨 당사자였다. 아들 아퀴노 대통령 역시 사회적으로 갈등을 빚는 원전 사업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곧 태도를 바꿨다. 정부는 부족한 전력 공급을 명분으로 새로운 원전부지 조사를 시작했고, 곧 국내외 원전 자본들은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2010년 12월 정부가 국제 원전 투자자들을 초청한 회의장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 2011년 3월 필리핀에서 재현된 반원전 시위. ⓒ핵안보정상회의 대응행동

하지만 2011년 3월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원전사업 재개를 주장하던 정치인들은 꼬리를 내렸고, 바탄 원전 재가동 계획은 연기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원전 사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꺾지는 않았고, 2025년까지 새 원전을 가동시키겠다는 장기 전력 계획을 내놓는다.

크루즈는 "우리가 계속해서 반원전 캠패인을 진행하는 이유는 필리핀 정부가 항상 기업이나 다른 나라 정부와 은밀하게 협상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반원전 운동은) 강력한 세력을 상대하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반핵 운동은 정부의 끈질긴 시도에 맞서 이제 정례화하고 있고 후대에게 '웰강 바얀'의 정신을 물려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 대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원전' 랭킹 1, 2위의 나라

대만의 환경운동 단체 환경보호연합(TEPU)을 이끌고 있는 왕주주 칭화대 교수는 의 지난해 조사를 인용해 대만에서 건설 중인 원전 1곳을 포함한 4곳의 원전이 모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원전 14곳'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원전 1, 2호기는 인구밀집도가 높은 뉴타이베이시티 인근에 있고, 3호기와 4호기 역시 안심할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다.

은 전 세계 211개 원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원전을 중심으로 반경 30km 안에 300만 명 이상 인구가 있는 6개 원전을 가장 위험한 원전으로 정했는데, 대만의 원전 1, 2호기가 모두 500만 인구를 30km 안에 두고 있어 1, 2위에 랭크됐다.

왕 교수는 "대만 사람들은 '설마 사고가 나겠나'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을 만나면 제2의 후쿠시마 사고가 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이 대만이라고 말한다"며 "한국 역시 위험성이 상존하는 국가"라고 말했다. 대만은 또 사용후 핵연료의 저장 여력이 한계에 달해 있어 사회적 문제를 빚고 있으며, 대만 내 반원전 단체들은 전체 전력공급의 18.1%를 차지하는 원전을 줄이기 위해 절전 캠페인을 벌여나가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 태국, '후쿠시마'가 살렸다

태국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대안 에너지 프로젝트'(AEPS)에서 온 산티 촉차이참난킷은 태국 정부가 과거부터 원전 계획을 꾸준히 추진해 오면서도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포기해 왔다고 설명했다.

1966년 태국발전공사(EGAT)는 정부에 처음으로 원전 건설 계획을 제안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시 태국 안에서 천연가스 자원이 발견됐다. 한동안 천연가스를 이용한 전력 생산에 의지하던 태국은 1996년 다시 원전 건설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지만 이듬해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다시 중단됐다.

200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태국 군부는 2021년까지 4개의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전력개발계획에 포함시켰다가 2010년 숫자를 5개로 늘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태국 내에는 핵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규제당국이 없고, 원전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도 없다고 평가하면서 다시 '난관'에 부닥친다. 그리고 이듬해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면서 태국은 원전 사업을 다시 3년간 연장했다.

하지만 산티는 "태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매력적인 신규시장"이라며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 태국 정부에 원전 사업 개발 압력을 가하면서 (원전 도입시) 인적자원 훈련이나 기술 이전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유혹하는 상태"라고 밝혔다.

그는 "태국 정부가 현재 선정한 5개의 원전 부지는 기술적인 차원에서 타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만 원전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 조직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원전이 값싸다는 편견에 쌓인 이들은 베트남과 같은 경쟁국보다 먼저 원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정부도 전력수요 전망치를 부풀려서 원전의 필요성을 선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가 태어난 나라지만 어리석다"

이날 포럼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북서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이다테무라(飯館村)에서 낙농업을 하던 하세가와 겐이치가 작년 원전 사고 이후 마을에서 겪었던 일을 소개했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의 사고 은폐 정황을 설명한 그의 이날 발언을 정리했다.

지난해 3월 11일 지진이 났고 12일 후쿠시마 원전 제2호기가, 14일 3호기가 폭발했다.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에 14일 마을 대책본부에 찾아사 방사능 수치를 물었더니 40마이크로시버트(μ㏜)라며 엄청난 수치라고 했다. 당시엔 그 수치가 뭘 의미하는 지 몰랐다.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치가 높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있다. 마을 대책본부를 나서려할 때 '촌장이 이 수치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본부를 나와 마을 사람에게 사실을 다 알리고 다음날 곧바로 집회를 열었다. "지금 이다테무라는 어마어마한 상황에 빠져있다. 방사능이 엄청나니 밖으로 나오지 말고 특히 아이는 절대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날은 이다테무라의 방사능 수치가 가장 높은 날이었다. 한 기자가 이날 방사능 수치가 100μ㏜를 넘었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그 수치는 3월 말이나 돼서야 발표됐다.

3월 20일 현에서 '강제는 아니지만 피난하고 싶은 사람은 하라'라는 메시지가 왔다. 우리 마을에 있던 250명 중 35명만이 피난길에 나섰다. 전체 촌민 6600명 중에서는 630명이 떠났다. 이후 나라에서 훌륭한 대학 교수를 이다테무라에 투입했다. 그리고 촌민들은 체육관에 모아놓고 '안전하니까 안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 중에 교토대에서 온 교수 그룹은 이 지역의 방사선량이 공포스러운 수준이라고 했다. 이렇게 높은 수치임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교수 그룹이 그 데이터를 들고 촌장에게 찾아가 피난을 권했지만 촌장은 데이터를 공표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촌장과 마을의 어른들은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계속 피폭을 당해갔다. 그런데 이후 일본 정부는 우리 지역을 계획적 피난 구역으로 설정한다. 하루 전까지도 마스크도 쓸 필요 없다고 하던 대학 교수들은 그제서야 위험하니까 떠나라고 했다.

기르던 소에서 짜낸 우유를 매일 땅에 버렸다. 계획적 피난지구로 설정되면서 소를 키워도 안되고 옮겨도 안된다고 했다. 소을 두고 사람만 떠날 순 없었다. 그러다가 소를 2마리 도축해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지 않으면 낙농가 소 전부를 도축해도 좋다는 지시가 왔다. 유통시켜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 소가 햄버거가 될지 소고기국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축을 위해 소가 트럭에 실려 떠나가던 날 한 주민은 차를 쫓아가면서 연신 미안하다고 흐느꼈다. 소를 키우고 싶어 귀농한지 10년이 됐던 청년도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그런 심정이었다.


ⓒ모리즈미 타카시

드디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핵발전소만 없었다면'이라는 글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나는 원동력을 잃었다. 핵발전소만 없었다면. 남은 친구들은 원전에 지지 말고 힘내라. 먼저 가는 걸 용서하라'라고 유서를 남겼다. 그에겐 7살, 5살 자식이 있었다.

원전은 일본에서 국책사업으로 추진됐지만 이 사고가 난 이후에야 대책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계속 피폭 위험을 무릅쓰고 논의 잡초를 베어내며 마을을 지키고자 한다. 가장 불쌍한 건 아이들이다. 앞으로 아이들은 이다테무라라는 출생 때문에 60여년 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사람들이 받은 차별을 반복할 것이다. 그 차별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국제사회가 그러한 차별이 없는 사회 만들도록 도와야 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가 마치 끝난 것처럼 수습 선언까지 했다. 터무니없는 얘기다. 녹아내린 핵연료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확인인 사람이 없다.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 꺼낼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다른 핵발전소 재가동을 꾀하고 있고 수출도 시도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나라지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저는 이 사고를 잊혀지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국제적 여론이 나서 일본이 바뀌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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