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대자보 2013-01-09일자 기사 '비운의 덕혜옹주는 일본에 '유학' 하지 않았다'를 퍼왔습니다.
[현장]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회장의 잘못된 표기, 유학 아닌 강제이주
“귀인 양씨의 장례식은 예정대로 어제 5일 오전 9시에 계동자택에서 발인하였다. 덕혜옹주께서는 천담복(국상 때 입는 상복이 아니라 3년 상을 치룬 뒤 100일 간 입는 흰옷) 차림으로 눈물을 머금으시고 중문까지 영영 떠나가는 어머니의 유해를 전송하셨다.”
-동아일보 1929년 6월 6일-

▲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강제로 끌려간 일본에서 귀국하는 덕혜옹주(동아일보 1929.6.3) © 이윤옥
어머니 장례식날 상복도 못 입고 이별해야하는 옹주의 심정은 어땠을까? 귀인 양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어머니로 고종의 4명의 부인 중 한명이다. 아버지인 고종의 나이 환갑에 태어나 (1912.5.25) 늦둥이로서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지냈지만 1919년 덕혜옹주가 7살 때 아버지 고종이 승하하게 된다. 이미 나라는 일본의 수하에 들어간 지 10년 가까이 될 무렵으로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 나이 13살 때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옹주를 일본땅에 강제로 보내게 된다. 옹주의 비극은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아버지 고종을 잃고 아버지처럼 따르던 순종임금은 덕혜옹주가 일본땅으로 강제 이주 후 1년 만에 승하하게 된다. 이어서 3년이 지날 무렵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양귀인이 돌아가시게 되는데 위 기사는 그때 장례식 기사이다. 여염집이라도 부모의 상을 당하면 상복을 입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이라는 규범에 어긋난다하여 덕혜옹주에게 상복을 입히지 않고 천담복이라는 여염집 여자가 입는 탈상 뒤 입는 흰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했다.
어제는 비운의 옹주로 알려진 덕혜옹주전을 보러 국립고궁박물관(2012.12.11-2013.1.27)에 다녀왔다.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환국 50주년) 기념으로 열리고 있는 전시관에는 옹주가 입었던 옷이랑 노리개, 경대, 화장품 등의 장신구와 옹주의 친필 엽서 등 평소 접해 보지 못한 물건들이 제법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 국립고궁박물관의 덕혜옹주전 소책자 표지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덕혜옹주의 일본유학)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은 코너에서 나는 그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주최 측의 세심하지 못한 표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일본유학)이라고 써두면 요즈음 유행인 (미국유학)이나 (필리핀유학)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덕혜옹주는 유학생 자격으로 간 것이 아님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옹주의 일본행은 강제 이주이며 볼모로 잡혀 간 것임에도 주최 측은 무슨 생각으로 (덕혜옹주의 일본유학 생활)이라고 버젓이 써둔 것일까?
기왕에 말이 났으니 유학이란 말을 좀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학(留學) : 외국에 머물면서 공부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국어사전 ≪大辞泉≫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부터 있던 유학(留學)이란 말은 오늘날과 그 쓰임새가 달랐다.
태종실록 32권, 16년(1416) 10월 11일자 기록에 보면,
“빈객(賓客)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강무(講武)에 세자를 데리고 가고자 하는데, 세자가 남아서 학문하기를 청하니, 어찌할까?’(召賓客卞季良等曰: “予欲於講武, 率世子以行, 世子請留學問, 如何?” 라는 말이 있는 데 여기서 ‘유학(留學)’은 남아서 학문 하는 것이지 외국에 머물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의 검은 마수가 점점 좁혀옴에 따라 종래에 쓰던 ‘유학’이란 말이 변질 되어 일본에 보내는 것 곧 ‘일본유학’이란 말이 왕조실록에 새겨지게 된다. 특히 고종 때 29번, 순종 때 8번은 거의 일본유학과 관련된 말이며 덕혜옹주가 강제로 끌려가는 것도 ‘유학으로 포장’되어 있다.
“덕혜 옹주(德惠翁主)에게 토쿄〔東京〕에서 유학하도록 명하였다.”- 순부 16권, 18년(1925 을축 / 일 대정(大正) 14년) 3월 24일(양력) 1번째 기록-
그러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 생각해보라. 13살 어린 소녀가 무엇을 배우겠다고 “일본유학’을 꿈꾸겠는가? 더군다나 환갑나이에 얻은 보배 같은 딸 덕혜옹주의 성장을 못보고 고종이 독살로 세상을 뜬 뒤 순종을 아버지로 여기며 의지했는데 그 순종이 덕혜옹주를 떼어 놓고 싶었겠는가? 그런데도 순종은 덕혜옹주에게 일본으로 유학하라고 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의 ‘일본유학’은 1910년 한일병합이전부터 집요하게 추진되었는데 고종실록 32권, 31년(1894) 10월 23일자 기록 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른바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개혁안 20개 조항)에 보면 일본유학이란 말이 나온다. “1. 정권(政權)은 모두 한곳에서 나오게 하여야 한다. 11. 경찰권은 한곳에서 행사하여야 한다. 17.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의 기구와 권한을 개정하여야 한다. 19.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여야 한다.”
눈이 유난히 크고 깜찍한 모습의 덕혜옹주는 누가 봐도 사랑받을 만큼 귀여운 용모를 지녔다. 전시장에 진열된 어렸을 때 입었던 앙증맞은 치마저고리하며 커서 입었던 노랑 저고리와 빨간 다홍치마, 삼작노리개 등은 옹주가 사랑하던 조선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으면 정신병에 걸렸을까? 전시장을 찾는 이들은 한결같이 비운의 옹주를 그리며 꼼꼼히 진열된 전시품을 둘러보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전시품 상당수가 일본문화학원 복식박물관과 일본 규슈국립박물관 소장품이었다는 점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명성황후 시해를 비롯한 황실가의 이어지는 독살과 황손들의 일본 강제 이주 등 숨 가쁜 시대를 살아낸 우리다. 덕혜옹주 탄생 100년 전시회를 이제라도 마련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지만 전시장 안에 (덕혜옹주 일본유학 생활)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으니 전시회가 끝나기 전이라도 고쳐놓았으면 한다. 옹주가 전시관을 둘러본다면 기겁하고 도망칠 일이다. 볼모로 잡혀간 시대의 시각으로 전시관을 꾸미지 못하고 (미국유학) 하듯이 꾸며 놓는 것은 본질을 잃고 껍질만 전시하는 것과 같다.
이윤옥 소장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외대 박사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자존심 고취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밝힌『사쿠라 훈민정음』인물과사상*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항일여성독립운동가 20명을 그린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발로 뛴 일본 속의 한민족 역사 문화유적지를 파헤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등이 있다.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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