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1일 목요일

“겉멋 든 20대 진보 난 그들이 싫었다”


이글은 시사IN 2013-01-29일자 기사 '“겉멋 든 20대 진보 난 그들이 싫었다”'를 퍼왔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20대 3명 중 한 명이 박근혜 후보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대는 어떤 생각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졌을까. 그들은 박근혜와 문재인을 선악구도로 가른 것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은 다 문재인’이라는 말이 꼭 맞는 것만은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자의 20대 득표율은 33.7%(방송 3사 출구조사 기준)였다. 20대 3명 중 한 명은 박근혜 후보를 택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직접 20대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합격 1위’ ‘고시학원’ ‘경찰 공무원 준비, 두 가지만 믿으면 됩니다.’ 대형 현수막이 걸린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 입시학원 근처에서 만난 20대들에게는 뚜렷한 지지 이유가 있었다. 등산용품 브랜드 패딩 점퍼 지퍼를 턱 밑까지 올린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담배를 물고 학원 앞으로 몰려 나왔다. 

“세상이 안 바뀌었으면 좋겠다”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는 김 아무개씨(25)는 귀찮은 듯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그냥 뭐, 경찰 채용인원 늘린다고 해서다. 그게 다다.” 반면 공무원 준비생 이지영씨(23)는 문재인을 택했다. 후보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다. “(내가) 일하려는 쪽을 늘린다고 해서”다.

ⓒ시사IN 조남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많은 서울 노량진 고시촌.

자신이 중산층 이상이기 때문에 박근혜를 택했다고 답한 20대도 있었다. 외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다니는 공인회계사(CPA) 시험 준비생 최 아무개씨(27)는 “저는 능력 있으니까요, 가만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자유방임, 자유롭게요.” 그는 자신의 성향과 맞는 이가 박근혜 후보라고 봤다. “지금 사회에 불만이 없다. 세상이 안 바뀌었으면 좋겠다.” 자기 소유의 외제차가 있는 대학생 이 아무개씨(25)도 박근혜 후보를 택했다.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지만 “현 체제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라는 게 그의 관측이다.

노량진역 지하상가 안 액세서리 가게에서 만난 점원 원 아무개씨(23)도 세상은 똑같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맥락은 달랐다. 원씨의 생각은 ‘누가 되든 다 거기서 거기’라는 회의에서 비롯됐다. 보수도 진보도 아니고 정치에 관심도 없는 원씨를 투표장으로 이끈 건 부모님의 말씀이었다. ‘본 것만 믿는다’는 원씨는 “엄마랑 아빠가 박정희 정권이 잘하는 걸 봤으니까 (박정희를) 잘했다고 말씀하시는 거고. (박근혜는) 당연히 보고 배운 딸이니까”라고 말했다.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박정희 향수’는 대구·경북 출신이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을 때 짙어졌다. 부모와 함께 경북 안동에 사는 유치원 교사 정윤정씨(24)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도 부모님의 ‘박정희 향수’였다. “집에서 뽑으라고 해서 뽑았다.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할머니는 (박근혜가)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불쌍하다’고 하셨다.” 대구 출신인 취업 준비생 이도영씨(23)는 단일화 국면에서 문재인 후보가 보인 태도를 지적했다. “(문재인은) 줏대 없이 안철수에게 의존하는 모습만 보였다.”

‘안철수’는 이번 대선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했다. 경북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남유리씨(24)도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박근혜였다. “안철수 뽑고 싶었는데 나중에 지들끼리 난리법석이었잖아요. 단일화를 하니 마니 하면서요.” 노원역 근처 한 카페에서 혼자 공부하는 20대를 만났다. 취업 준비생 박광현씨(25)도 선거 도중 마음이 바뀐 경우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이 마음에 들어서 문재인 후보를 응원했어요.” 그러나 박씨는 막판에 박근혜를 택했다. 문 후보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선거 공보물에서 박 후보가 자기 공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 후보의 유인물에서는 ‘이명박근혜’라는 구호만 보였다. “자꾸 (상대방) 비난만 하더라고요. 자기 공약에 힘이 있으면 그랬겠어요?”   

ⓒ뉴시스 지난해 12월14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신촌에서 젊은이들을 향해 야간 유세를 펼치고 있다.

TV조선 (특집 뉴스쇼 판)에 출연해 박근혜 후보 지지 인터뷰를 했던 이서원씨(24)는 문재인 후보의 패배에 대해 “당연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진보 진영의 패배 이유를 ‘문재인은 선(善), 박근혜는 악(惡)’이라는 구도에서 찾았다. “그런데 문재인도 결국 네거티브 논란에 빠졌다. 다를 게 없다는 거다.”  


‘문재인은 선(善), 박근혜는 악(惡)’이라는 또래집단의 정서 속에서 20대 박근혜 지지자들은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밝혀야 돼요?” 저녁 8시, 연인과 회사원, 대학생 등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 매장의 아르바이트생 이홍현씨(21)는 쑥스럽게 웃었다. 같은 매장에서 일하는 민희윤씨(22)의 첫 마디도 “비밀투표잖아요”였다. 두 사람은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강남역 교보문고, 성공·처세 코너 옆 박근혜 대통령 당선기념 특별 코너가 마련됐다. (여풍당당 박근혜) (근혜노믹스) (박근혜의 꿈). 1시간30분을 기다렸지만 박근혜 코너 앞에서 발길을 멈추는 20대를 찾기는 힘들었다. 박 후보를 지지한 재수생 권 아무개씨(20)는 스스로를 “정치적 소수자”라고 부른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들과 여러 번 싸웠다. 이제는 마음을 비웠다. “서로 짜증만 내니까 SNS에서는 글을 안 쓰게 돼요.” 

ⓒ시사IN 이명익 교보문고에 박근혜 당선자 관련 코너가 마련돼 있다.

육군 만기 전역한 지 아무개씨(24)도 대선 지지 후보를 묻는 질문에 박근혜 후보라고 답했다. 복무한 이기자 부대에 대한 자신감을 ‘이부심’이라고 표현하는 그가 이번 대선에서 ‘종북세력’보다 불만스러운 건 “꾸준히 밀리는 걸로 예측됐는데도 결과에 승복 못하는 20대들”이다. 지씨는 SNS에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라고 했다. 대선이 끝나고 그의 페이스북이 ‘전쟁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개표 결과를 옹호하는 그의 페이스북 게시 글에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문재인 지지자의 댓글이 달렸다. “야, ‘싫어요’는 없냐?”설문조사는 문재인, 투표는 박근혜에

대학생 엄선웅씨(25)도 SNS상에서 문 후보 지지자들에 대한 피로감이 있다. “선거 끝나고 싸운 애들도 있다. 내가 박근혜 페이지에 ‘좋아요’를 눌렀다. 근데 친구들이 ‘너 미쳤냐?’고 했다.” 엄씨는 젊은 문재인 지지자들에 대해 ‘종교를 믿는 것 같다’고 평했다. 

학원 강사 남지영씨(24)는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을 지지했지만 SNS를 휘젓는 ‘겉멋 든 20대 진보’가 싫었다. “뭔가 다르다고 말하는 ‘입진보’들은 손발이 오그라들죠.” 대학생 이연민씨(25)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는 대선 지지 후보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는 ‘문재인’이나 ‘무응답’을 택했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20대라면 문재인을 지지해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강요 때문이다. 그런데 이씨는 “뜨거운 가슴은 이상적이고 가능성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김수민 인턴 기자  |  webmaster@sisain.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