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배타 교리 넘어서야 기독교 영성 회복할 수 있다


이글은 대자보 2013-01-27일자 기사 '배타 교리 넘어서야 기독교 영성 회복할 수 있다'를 퍼왔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영성과 운동성에 있어

이천년 역사를 이어온 기독교의 맥을 크게 세 줄기로 나누면 ‘교리의 기독교’와 ‘영성의 기독교’ 그리고 ‘운동의 기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줄기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별개로 전해진 것도 아닙니다. 서로 얽히고설킨 채 시대에 따라 어느 한 쪽이 두드러지기도 하면서 긴장관계를 이루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중 인류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단연 교리의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굳이 기독교를 세 줄기로 구분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인류 역사에 너무나 큰 아픔을 안긴 교리의 기독교를 넘어서고, 영성의 기독교와 운동의 기독교가 갖는 귀한 가치와 신앙을 한국 교회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교리의 기독교’는 배타적인 교리와 그에 따른 독선으로 세상에 갈등을 일으켜온 기독교의 부정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며, 기독교 교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 교리는 배의 닻과 같습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교리란 배의 닻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닻이 강이나 바다의 모래바닥에 너무 깊이 박히면 배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결국 고철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바닥에 든든히 고정하지 않으면 배는 이리저리 표류하게 됩니다. 교리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리가 갖는 위험한 성격을 잘 짚어내면서도 교리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 교리가 교회와 회중에 끼친 영향력은 존 스토트가 지적한 양 극단의 위험을 피하며 조화를 이루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조직이란 마치 생명체와 같아서 어느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 생존하고 팽창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마련인데, 그 조직의 생리를 제어하지 못한 교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주 교리를 무기로 삼아 그 구성원들을 옥죄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지난 역사를 통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해진 교회조직 자체의 생리와, 조직의 상층부에 자리한 사제계급, 그리고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여 조직이 생장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해준 신학자들에 의해 인류사회에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존 스토트의 비유대로라면 닻이 바닥에 너무 깊이 박혀 배가 썩어가며 자신과 주변에 심각한 문제를 생산해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인류역사에 큰 슬픔을 안긴 ‘교리의 기독교’를 한국 교회와 교우님들이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며, 이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교리 기독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활발한 학문적 논의와 영적 성찰을 거쳐 배타 교리의 함정에서 거의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기독교회의 일부, 근본주의가 횡행하는 미국, 그리고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교리 기독교가 교회를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영성과 운동성에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영성의 기독교를 주목하기에, 영성이란 무엇이며, 과연 기독교의 영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먼저 교우님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운동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기독교의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의 사전적 의미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비가시적이면서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영성’을 생각할 때 어떤 현상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신과 직접 대면하거나 대화를 주고받는 등의 초월적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기적이나 병고침, 신과의 대화나 대면 등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영성의 결과일수는 있어도 그 자체를 영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현상’에 집착하게 되면 진정한 영성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중심개념은 ‘초월자와의 관계성’입니다. 초월자란 실존자와 구분되며 실존자의 한계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실존자의 상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존재나 우주의 법칙, 원리 등을 말합니다. 제가 초월자의 개념에 우주의 법칙이나 원리까지 포함시켜 교우님들이 불편을 느끼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속성을 인격체 안에만 가두지 말고 초인격적 속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원화된 세계에서 이웃종교와의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인격체 안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 기독교회가 신관의 배타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독선과 한계에 계속 갇혀있게 됩니다.

3.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What is God?)’라고도 물읍시다.  

신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어느 학자는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What is God?)’라고도 물읍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제안대로 “하나님은 무엇인가?”라고도 묻는다면, 그분을 우주의 이(理)나 법(法), 또는 공(公)으로 이해하는 이웃종교와의 폭넓은 대화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하여 우리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갖고 있던 독선과 배타로부터 빠르게 벗어나 지구마을의 아름다운 종교문화와도 어깨동무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일부 교우님께서는 “하나님을 감히 ‘그것’이라고 폄하하다니, 신성모독이 아닌가?” 또는 “다른 종교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하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웃종교와 문화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인격’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히는 것이 오히려 신성모독이고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신격’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개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면을 할애하겠습니다. 이 주일편지는 올 한 해 동안 계속될 예정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말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은 말격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고 동물에게도 동물에 맞는 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격은 당연히 그에 걸맞는 하나님격 즉 초인격적인 ‘신격’이어야지 그분을 인격으로(만) 이해하려는 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결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초인격적 속성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한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갇혀 있던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나와 더욱 깊고 풍요로운 기독교 영성으로 진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의 궁극적 속성을 ‘존재라기보다는 지성’으로 파악한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도달했던 기독교 영성의 절정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런 보다 깊고 넓은 이해는 이웃종교 및 동양사상과의 폭넓은 대화를 가능케 하여 심각한 종교간 갈등을 겪고 있는 21세기 우리 지구마을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날 당신의 자녀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절실한 명령으로 우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한국 교회의 과제이며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4. 기독교의 영성은 ‘현상’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성의 궁극이 인격이건 인격을 뛰어넘는 초인격적인 그 무엇이건, 우리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현상’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을 하고 기적을 하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풍부하다”든가 “영성이 꽃피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그분(또는 그것)과 하나가 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 영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발아할 때,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기독교 영성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라도 함부로 다루거나 해치지 않습니다. 돌뿌리 하나,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의 손길이 담긴 것으로 보고 귀하게 여깁니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이 발아하면 삶의 모든 영역으로 그 풍요로움이 흘러넘쳐 세상과 자연,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우리 인생을 깊이 사랑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과 어울려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 영성이 발아하면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로 봅니다. 그리하여 환경이 어떻건 외모가 어떻건, 돈벌이나 학벌, 스펙이 어떻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며 존중합니다.

기독교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세상을 진취적이며 적극적으로 살아낼 힘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과 하나로 합일되어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입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대하기에,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심는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영성이 꽃핀 사람에게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교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란치스코나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비롯한 중세 신비주의자들, 이슬람교의 영성을 꽃피운 수피들, 천주교 사제이면서 인도에서 종교간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든 앤소니 드 멜로 신부 등은 한 인격체 안에서 영성이 발아할 때 그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개인의 인격을 넘어 분출하는 그 향기가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보여준 산 증인들입니다.

우리 교우님들도 영성이 꽃피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시기를 기도하며...

류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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