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1일 금요일

노사합의 그 후 더 깊어진 불안


이글은 시사IN 2013-0110일자 기사 '노사합의 그 후 더 깊어진 불안'을 퍼왔습니다.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가 목을 매 숨졌다. 그 소식을 접한 현대중공업 전 노조 간부가 자살했다. 노동자의 죽음은 이어졌다. 김진숙의농성 이후 해결된 줄 알았던 한진중공업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2월26일 아침,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 빌딩에 붙어 있는 ‘Build Your Dream’이라는 플래카드는 여전했다. 입구에서 아침 선전전을 벌이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도 익숙했다. 1년 전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한창일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파란 작업복 위에 흰 옷을 하나 더 걸쳤다. 상복이었다. 닷새 전 한진중공업 노조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동료 최강서씨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차해도 지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2011년 309일 동안 이어지던 고공농성을 취재하러 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영도조선소에 들렀을 때, 돌아가는 상황을 들려주던 그였다. “1년 만에 이런 일로 다시 뵙네요.(기자)” “그러게요, 우리는 서로 안 만나는 게 좋은 건데….(차해도)” 차 지회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사IN 이명익 지난 12월26일 최강서 조합원의 빈소를 찾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하나같이 그가 죽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다른 조합원도 비슷한 상태였다. 한 조합원은 “정말이지 강서가 죽을 줄은 몰랐다. 아직도 안 믿긴다. 정신이 멍하다”라고만 했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의 한 관계자는 “다들 충격이 너무 커서 극도로 예민하다.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분위기다.오늘 아침에도 선전전을 하다 관리 직원과 노조 간부 사이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났다”라고 귀띔했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정영주 총무부장도 “또 다른 사고가 생길까봐 서로 불안해한다. 누구 한 명 안 보이면 다들 찾으러 다닌다”라고 말했다. 

영도조선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부산 영도 구민장례식장도 마찬가지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최씨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빈소를 찾았다는 한 지역 시민사회단체 인사는 “조합원 중에는 흐느끼거나 통곡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들 눈만 새빨개져서 울음을 참았다. 1991년 박창수, 2003년 김주익·곽재규에 이어 2012년 최강서까지. 10여 년 단위로 이어지는 죽음에 다들 충격이 너무 크다. 죽음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조합원들이 제대로 애도도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진중공업 관련 일지

1991년 5월6일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의문사 2003년 6월11일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시작 2003년 10월17일 김주익 지회장 자살 2003년 10월30일 곽재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자살 2003년 11월14일 노사, 손배 가압류 철회, 노조원 복직 협상 타결2010년 12월15일 회사 측, 400명 희망퇴직 계획서 노조에 통보 2011년 1월6일 김진숙 지도위원, 정리해고 철회 요구하며 고공농성 시작 2011년 1월12일 회사 측, 희망퇴직 거부한 290명에게 정리해고 통보 2011년 6월11일 희망버스, 한진중공업 첫 방문 2011년 11월10일 노사, 정리해고 합의안 가결(1년 후 재고용 등). 김진숙, 고공농성 해제 2012년 11월10일 권고안에 따라 정리해고자 92명 재입사했지만 4시간 만에 휴업 2012년 12월21일 최강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 자살

빈소를 지키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이제 좀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서 조합원들을 챙겨야 한다”라고 다짐하듯 말했지만, 다음 날 집회에서 읽을 최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 결국 몇 번씩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김 지도위원이 기억하는 최강서씨는 반듯하고 남을 잘 챙기는 밝은 사람이었다. “내가 고공농성을 할 때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문자를 보내서 밥 잘 챙겨 먹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자기는 꼭 회사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유서를 보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데 언론과 회사에서는 생활고로 인한 자살로 몰고 가려고 한다. 지난해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은 회사가 강서를 죽음으로 끌고 간 거다. 예전에는 ‘죽어야 이 싸움이 끝나나’ 했는데, 이젠 죽어도 끝나지 않는 싸움이 된 거 같다.”


회사 쪽 노조 생기자 동료들 빠져나가


최강서씨는 서른네 살의 생을 마감하며 휴대전화 메모장에 ‘유서’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 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라고 썼다.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손해배상을 철회하라’는 말도 남겼다. 


하나같이 그가 죽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밝고 힘차게 투쟁을 이끌었던 젊은 노조 간부를 죽음으로 몰아간 건 무엇이었을까. 한진 노조 조합원을 위해 2012년 상반기 진행된 심리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한 최씨는 10년 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은 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엿볼 수 있는 상담자료 및 논문 등을 입수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였던 아버지에 이어 200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해 배관 업무를 맡았던 최강서씨는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해고에 대한 불안은 최씨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2009년 회사가 희망퇴직을 접수할 때, 그는 불면증과 탈모를 앓았다. 당시 최씨는 잘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 도크에 뛰어내리는 생각까지 했다. 산재로 죽으면 보상비가 나올 테고 그것으로 아들 둘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궁리했다. 우울증이었다. 이후 회사가 구조조정을 잠시 중단하면서 최씨도 정신 건강을 회복했지만 해고의 그림자는 다시 드리워졌다. 


2011년 2월14일 해고자 명단에 최씨의 이름이 올랐다. 정리해고를 단행한 직후 회사는 주식 170억원을 주주에게 배당했다. 회사가 진짜 어려워서 정리해고를 했다면 스스로 나갔겠지만 기업 윤리도 없어 보이는 작당에 해고 통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공농성을 벌였고, 땅에 남은 한진 노조 조합원은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다. 희망버스 등과의 연대로 정치권이 움직였고 지난해 11월10일 노사는 합의를 이뤘다. 합의안은 △해고자 94명 1년 내 재고용 △해고자 생활지원금 2000만원 지급 △형사 고소·고발 취하,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 최소화 등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정리해고자로서 1년을 버텨내는 일은 힘들었다. 2개월 정도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변에 무능한 사람처럼 비칠까 걱정이 되었다. 다른 직장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진중공업 다니셨죠?”였다. 재취업을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불안감도 커졌다. 회사가 합의를 모르쇠로 일관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복직이 되어도 일이 없다는 이유로 휴업을 시킬 가능성도 높다고 내다봤다.

 
ⓒ시사IN 이명익 지난 12월26일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퇴근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노·노 갈등도 심각해졌다. 지난해 복수노조가 시행되면서 올해 초 또 하나의 노조가 생겼다. 친회사 성향인 새 노조는 조합원 570명을 확보해 132명이 가입한 기존 노조 대신 대표교섭권을 확보했다. 최씨는 기존 노조 조직차장으로서 동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며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상처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기존 노조의 힘이 약해질수록, 지난해 노사가 이룬 정리해고 철회 합의를 회사가 깰 가능성도 높다고 내다봤다. 그런 이유로 올해 6월부터 기존 노조는 천막농성을 하며 손해배상 158억원 청구소송 철회, 민주노조 말살정책 철회, 단협 해지 철회 등을 주장했다. 최씨의 유서에 담긴 요구사항과 같은 내용이다. 

심리 상담에 참여했던 홍이수경 아리랑풀이연구소 상담가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심리상담을 했던 그룹 내에서 가장 막내였던 그는 ‘행님’ 소리 듣고 싶다면서 자기 별명을 ‘형님’으로 지을 줄 아는 유쾌한 남자였다. 분위기를 좋게 이끌며 앞으로 더 잘 싸울 거라고 말했던 강서씨가 죽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 깊은 절망감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프다.” 최씨를 상담하고 이후 논문() 작성을 위해 개인면담을 했던 차명정 박사는 그의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10년 후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좀 크면 그때 아빠가 이런 일을 겪으면서 더 단단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겨우 반년 전의 최씨는 절망보다는 희망의 언어를 더 많이 쓰던 사람이었다. 

11월10일 최씨를 비롯한 92명이 복직되었다(전체 해고자 94명 중 나머지 2명은 다른 곳으로 재취업하거나 명예퇴직을 했다). 하지만 불과 4시간 만에 다시 휴업에 들어갔다. 일감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미 700명 정규직 생산인력 중 500여 명이 6개월씩 돌아가며 유급휴업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회사 쪽은 경기 불황이라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고 설명하지만,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회사가 의도적으로 물량을 필리핀 수빅 조선소로 돌리고 있다고 의심한다. 영도조선소의 문을 닫기 위한 절차라는 것이다. 

싸움은 계속 공회전 상태였다. 그 사이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에 걸린 158억원 손해배상 가압류 재판은 계속 진행되어(아래 상자 기사 참조) 오는 1월18일 선고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던 지난 12월21일 최강서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월26일, 한진중공업 회사 측은 노조의 교섭 요구에 대해 “(최씨의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안이다. 노사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어 교섭 요구 수용이 어렵다. 단 유가족과의 협의는 진행할 의사가 있다”라고 전해왔다.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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