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1일 월요일

“25년 전 시민들의 염원… 참여 못했던 마음의 빚 갚고 싶었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2-06-11일자 기사 '“25년 전 시민들의 염원… 참여 못했던 마음의 빚 갚고 싶었다”'를 퍼왔습니다.

ㆍ‘610시민합창단’ 이두영·김무성씨

6월항쟁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10일 서울광장은 25년 전 그날처럼 뜨거웠다. 태양이 내뿜는 열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염원이 어우러졌다. 이번 행사는 여느 기념식과 달랐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정성으로 마련된 무대가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610시민합창단’ 공연은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다. 합창단에 자원한 이들의 갖가지 사연과 뒷얘기도 흥미롭다.

합창단원 이두영씨(45)는 25년 전 6월항쟁 당시엔 군복무 중이었다. 6월항쟁은 TV를 통해 어슴푸레하게 경험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로 구성된 ‘610시민합창단’이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25주년 국민행사’에서 공연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이씨는 항쟁의 진정한 의미도 1991년 제대를 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때 그 시절의 함성과 열정에 동참하지 못한 걸 평생 한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면서 “초등학생인 두 아들에게 역사가 거꾸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새겨주고 싶어 합창단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가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는 대학생이 사회문제와 담을 쌓고 지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부터 3년간 빈민운동단체에서 일했다.

하지만 시민단체 활동을 접은 뒤로는 사회문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다. 집회에도 참가해본 적이 없다.

그는 “아이들, 아내와 함께 먹고사는 일에 급급했고 그것을 핑계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뭔가 빚을 진 느낌, 나는 덤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부채의식이 그를 610시민합창단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씨는 자신의 행동이 역사를 이끌어간 ‘그들’의 용기에 비해 작고, 마음의 빚을 모두 털어버리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안다. 

이씨는 “아내가 시민합창단을 하면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했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기도 했다. 이씨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동안 꾸준히 활동하신 분들도 계시는데 이렇게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합창단 참여를 계기로 아이들과 6월항쟁에 대해 얘기해볼 기회가 있었다고도 했다. 이씨는 “아이들에게 6·10항쟁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마치 조선시대에나 있었던 이야기로 받아들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자라나는 세대들이 25년 전 이날이 우리나라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합창단에서 베이스 파트를 맡은 김무성씨(41)는 6월항쟁 당시 부산에서 살았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김씨는 “당시 부산에서도 집회가 열리곤 했는데 나는 너무 어렸고, 학생 본분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말을 듣고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김씨는 6월항쟁보다는 1991년 명지대 강경대씨 사망 사건에 더 큰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사고 당시 김씨는 재수생 신분이었다. 김씨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학원에 가야 한다며 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생 시절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남들과 함께 집회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졸업 후엔 어떤 집회에도 나가본 적이 없다. 그가 시민합창단에 지원했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정치색이 있는 행사에 왜 참여하려 하느냐”며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김씨는 그들에게 “6·10항쟁은 보수·진보를 떠나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역사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니다”라면서 “6·10항쟁이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줬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곽희양·김한솔 기자 hu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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