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3일 수요일

박근혜 당선자, 남북대화 끌어낼 자산 많아


이글은 시사IN 2013-01-23일자 기사 '박근혜 당선자, 남북대화 끌어낼 자산 많아'를 퍼왔습니다.
박근혜 정부 남북대화의 출발은 이산가족 문제가 유력하다. 1972년 7·4 공동성명도 이산가족 문제에서 시작됐다. 박 당선자는 2002년 방북 때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박근혜 당선자는 예상 외로 남북관계에 관해 많은 자산을 갖고 있다. 남쪽의 대통령이 된 인물 중, 대통령이 되기 전에 북한 최고지도자와  합의한 사항을 들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아버지 대에서 이룩하지 못한 7·4 남북공동성명의 열매를 맺자”라고 서로 다짐했다고 하는데, 남북관계의 효시라 할 7·4 남북공동성명의 계승과 완성을 유업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자산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이 7·4 공동성명과 2002년 박근혜 당선자와 김 전 위원장의 합의가 어쩌면 깊게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72년 7월4일 남과 북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수뇌부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는 점에서, 남북 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의 효시가 된 중요한 선언이다. 

ⓒ사진공동취재단 2001년 2월28일 제3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마지막 날에 남쪽 가족들이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7·4 공동성명이 애초 이산가족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은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해온 것 같다. 실제로 남북한이 휴전 이래 오랜 기간 갈등을 지속하다가 1970년대 초반 국제적인 데탕트 흐름에 편승해 처음으로 남북대화를 시작할 때, 그 출발은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적십자회담은 남북의 접근 방식 차이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30년 만에 만난 그 2세들이 이산가족 1만명 상봉을 위한 상설면회소 설치라는 통 큰 합의를 했다.  

2002년 박근혜 당선자의 방북은 처음부터 이산가족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그녀의 자서전에 소개된 방북기에 보면 2002년 5월10일 오후 1시 베이징으로 가려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77세 노인 한 분이 다가와 자기 가족의 신상명세가 담긴 쪽지를 건네주며 가족을 꼭 좀 찾아달라고 간절하게 얘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5월13일 저녁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으로 찾아온 김정일 위원장과 1시간 동안 단독 면담을 할 때 대화의 하이라이트 역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문제였다. 그는 김 위원장에게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를 제안했다’고 자서전에 쓰고는 그 다음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는 굉장히 필요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라서 북한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이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의 대화는 금세 속도가 붙었다.” 

ⓒ박근혜 후보 캠프 제공 2002년 5월13일 북한을 방문한 박근혜 당선자가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하고 있다. 이때 박 당선자는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를 제안했고 김 위원장도 이에 화답했다.

금강산을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방도

이 합의는 그 자체로도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 남북관계는 2000년 6월의 정상회담 열기가 2년여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의 경우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그 해에 두 번,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한 번씩 상봉 행사가 있었으나 100명, 200명 단위의 상봉으로는 부지하세월이란 불만이 많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래서 2000년 9월 남쪽이 상설면회소를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북한 측이 묵묵부답이다가, 2002년 5월의 박·김 면담에서 극적으로 타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참여정부가 집권하면서 건물은 더디게라도 진행되었으나 두 사람 간 합의의 중요한 내용들은 다시 묻혀버렸고, 지금까지의 추론이 맞는다면 북한 측이 신년사를 통해 매우 모호한 방법으로 이 합의의 이행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7·4 공동성명과 2002년 박·김 면담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두 회담 모두 최고위급에 직통하는 채널이 가동됐다는 점이다. 7·4 공동성명의 첫 접촉은 남북 적십자회담을 하는 와중에 남쪽에서 적십자 예비회담과는 별개의 비밀 실무자 접촉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신임장을 지참한 대한적십자사의 정홍진과 북한 노동당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의 신임장을 지참한 북한 적십자사의 김덕현 실무자 간에 판문점 비밀 접촉이 시작됐고, 그 다음 순서로 이후락 부장의 평양 방문 및 김일성 주석 면담,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 및 박정희 대통령 면담이 이뤄졌다. 

이처럼 최고위급의 직통 라인이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전통은 김대중 정부 시절까지는 어느 정도 이어졌으나 그 뒤로 넘어가면서 남쪽의 통일부와 북쪽의 통전부 간의 실무 단위로 떨어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박근혜 대표 방북 과정에서 북쪽의 최고위급 직통 라인이 위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적으로는 북쪽 민화협 초청에 의해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산하 유럽·코리아재단의 장자크 크루아 씨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정일 위원장 직보 라인이었던 베이징의 범태평양 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범태·회장 리도경)와 범태의 국내 파트너인 시스젠(대표 권오홍)의 주선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공식 사이트인 조선인포뱅크를 운영하던 범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스젠과 더불어 이산가족 화상 상봉 및 화상을 통한 서신 왕래 사업을 추진하는 등 매우 앞선 시도를 한 바 있다. 

2006년 10월 북핵 1차 실험 때 남북 간의 채널 단절 시에도 최후에 이 라인이 활용된 바가 있다. 그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된 보고서에 따르면 북쪽은 참여정부와도 이산가족 상봉을 활성화하려는 의사를 명확히 했으나 정권 말기 제대로 이를 추동하지 못했고, MB 정부에서는 사실상 남북 간의 소통이 전면 차단되어 본질적인 해법을 찾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지금 다시 이산가족 문제가 화두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박근혜 당선자와 김정일 전 위원장 간의 합의 사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산가족 문제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다. 통일부에 가족 상봉을 신청한 사람 중 많은 이가 사망하고 이제 7만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대부분 고령자라 시간이 별로 없다. 지금이야말로 남북 최고 책임자가 다른 모든 문제에 앞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획기적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또한 이산가족 문제의 인도주의적 특성이나 남북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 등으로 볼 때, 지난 5년의 남북관계 공백을 메우고 또 다른 협력 사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판으로도 이보다 좋은 어젠다가 없다. 금강산을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방도이기도 하다. 즉 금강산을 단순히 관광을 위한 땅이 아니라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과 결합을 위한 땅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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