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2일 토요일

“내가 죽으면, 가족 1명 살려준다고…” 자살 기도 쌍용차 류씨 형제


이글은 경향신문 2013-01-11일자 기사 '“내가 죽으면, 가족 1명 살려준다고…” 자살 기도 쌍용차 류씨 형제'를 퍼왔습니다.

ㆍ“내가 쌍용차 떠나면 남은 동생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류모씨(60)는 쌍용자동차를 “‘청춘을 바쳤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단순히 먹고살게 해준 곳 이상이었다. 이름이 여러 번 바뀌고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자랐지만 회사는 같은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동생 셋과 자식 둘을 장성한 어른으로 키워냈다. 지난 10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에서 만난 그는 “내가 쌍용차와 보낸 세월은 40년이다. 쌍용차와 상관없이 살아온 햇수는 그 절반밖에 안된다”고 했다. | 관련기사 4면

그의 수더분한 아내가 아들, 며느리 이야기를 꺼낼 때만큼이나 쌍용차를 떠올리는 그의 얼굴은 밝았다. “일하면 먹고살 수 있었고, 잘 먹고 잘 살수록 회사도 잘됐다”고 했다. 쌍용차 안에서 모든 게 잘 풀렸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넷째 동생에게도 쌍용차를 소개했다. 지난 8일 밤 자살을 기도한 쌍용차 노동자 류모씨(50)가 그의 넷째 동생이다. 동생은 1990년부터 평택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큰형으로서 류씨는 동생이 결혼해 평택에 자리를 잡을 때도 도움을 줬다. 그는 “쌍용차가 괜찮은 직장이니까 사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애꿎은 병원 천장을 올려다봤다. 동생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1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있는 쌍용자동차 농성장에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기원하는 철탑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6남매 맏형은 19살부터 공장 생활넷째와 19년 함께 다니다 희망퇴직외국기업에 넘어가면서 고난 시작

큰형 류씨는 19세이던 1972년부터 하동환자동차공업(쌍용차 전신) 영등포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로 버스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프레스(금속판에 힘을 가해 모양을 변형시키는 기계) 같은 기계들이 없어 일일이 망치로 두들겨 금속판을 폈다. 그러다보니 200명이나 다니던 공장에서 만드는 버스가 하루 한 대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버스를 만드는 일 자체가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열심히 일했다. 영등포에 자그마한 단칸방을 얻어 가정도 꾸렸다.

그 무렵 아버지가 숨졌다. 6남매의 맏이인 류씨에게는 아직 장성하지 못한 삼남매가 남겨졌다. 그중 어릴 적부터 똑똑했던 동생을 고향에서 데려왔다. 고등학교는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세 사람이 부대끼며 3년을 지냈다. 신혼이 그렇게 지나갔다.

1981년부터는 평택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회사의 이름은 동아자동차공업이었다. 중소기업의 티를 벗어 어엿한 중견기업이 된 회사는 일할 맛 나는 곳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창 좋은 시절이었다.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동생이 1988년 장가를 가게 되자, 류씨는 평택에 전셋집을 하나 얻어줬다. 1990년에는 동생을 평택 공장에 취직시켰다. 쌍용차로 이름이 바뀐 회사는 전보다 더 좋은 직장으로 자랐다. 그렇게 형제는 19년 동안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 그들의 직장은 어느덧 대통령에게 산업훈장을 받는 대기업이 돼 있었다. 

크고 작은 위기는 몇 차례 있었다. 외환위기를 겪었고 대우자동차에 인수됐다가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형제는 그 시간들을 회사와 함께 견뎌냈고, 회사는 언제나 위기를 탈출했다. 하지만 2009년의 상황은 달랐다. 외국 기업이 인수한 후 경영난은 가속화됐고 노사 간의 불협화음은 심화됐다. 2009년 5월 쌍용차는 77일간의 옥쇄파업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치닫게 된다. 159명이 정리해고되고, 1904명이 희망퇴직했으며, 무급휴직자만 455명이 됐다. 류씨는 희망퇴직자 중 한 명이 됐다. 그는 “평택에는 가족 여러 명이 쌍용차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동생을 위해 희망퇴직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족 중 한쪽이 죽으면(퇴직하면) 다른 쪽은 살려준다는 말을 듣긴 했다”고 말했다.

형은 떠났고, 동생은 살아남았다. 조립2팀(체어맨·로디우스)에 남은 동생은 만 2년을 꼬박 잔업 없이 일했다. 하루 근무시간도 4~5시간을 넘지 못했다. 형이 있던 시절의 회사와는 달랐다. 월급은 150여만원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아팠고 회사는 정상화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회사에나 동생에게나 가장 아픈 시절이었다. 결국 동생은 6장짜리 유서를 남기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다.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서 류씨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쌍용차에서 온 동료들과 마주치길 피하는 듯했다. 그는 “(회사가) 안 좋아지는 걸 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이렇게 되도록 도와주지도 못했으니까.” 그가 한숨처럼 내뱉은 마지막 말은 누구를 돕지 못했다는 자책인지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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