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보안사와 싸운다는 자존심이 나를 지켰다”


이글은 시사IN 2012-11-21일자 기사 '“보안사와 싸운다는 자존심이 나를 지켰다”'를 퍼왔습니다.
추재엽 양천구청장 고문 혐의에 결정적 증거가 된 저자 김병진씨를 만났다.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갔다가 통역사로 일하라고 강요받은 그는 “무슨 짓을 하는지 반드시 기록하겠다”라는 각오를

김병진씨(57)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부채감 때문이었다. 고백하건대 기자는 서울 양천구에 산다. 이번에 법정 구속된 추재엽씨가 3선 구청장이 되는 것을 지난 10여 년간 지역주민으로서 지켜보았다. 추씨의 고문 전력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이 나온 것이 2000년대 중반. 그러나 ‘설마’ 했다. 선거 과정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던 상대 후보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보며 역시나, 그저 그런 흑색선전이었나 보다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난 10월11일, 서울남부지법은 추씨가 보안사 근무 시절 고문에 가담한 사실이 인정되는데도 법정에서 이를 부인한 혐의 등이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 김병진씨가 1987년에 쓴 책 (보안사)였다(한국어판은 1988년 출간). 재일동포 3세로 1980년대 중반 보안사에 근무했던 김씨가 일본으로 탈출한 직후 목숨을 걸고 써내려간 이 책에는 추씨를 비롯해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보안사 수사관 20여 명의 실명이 적시돼 있다.

ⓒ시사IN 조남진 김병진씨(위)는 일본에서도 북한 간첩 혹은 남한 공작원이라는 상반된 모함에 시달렸다.

재판부는 당시 상황에 대한 김병진씨의 진술이 구체적인 데다 “(저술 당시) 피고인(추재엽)에 대해 (김씨가)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 신빙성이 있다”라고 판시했다. 김씨의 치열한 기록 정신이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25년 만의 단죄를 가능케 한 셈이다. 추재엽씨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 나종인씨(71)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른 김씨를 11월3일 만났다.  

보안사와 인연을 맺은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1983년 한국 유학 중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에 처음 끌려갔다던데.
간첩 누명을 쓰고 온갖 고문을 당한 것만도 억울한데 석 달 만에 공소 보류로 풀려나자마자 보안사에서 통역사로 일하라는 강요를 당했다. 차라리 감옥에 보내달라, 항의하고 읍소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집사람과 죽어버릴까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직 돌도 안 된 아이를 두고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보안사 일을 받아들였다는 건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를 불법으로 구금하는 동안 “니 마누라는 윤락녀 만들고 니 자식은 고아원에 보내버리겠다”라고 협박했던 그들이다.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텐데…, 계시랄까. 어느 순간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어디 한번 똑똑히 지켜보자. 내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고 말겠다. 뭐 그런 생각, 각오? 그런 게 생기니까 비로소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기더라.

메모나 일기를 남길 수도 없었을 것 아닌가. 언제 가택수색을 당할지 모르는데.
2년간 근무하는 동안 있었던 중요한 일들은 모두 머릿속에 담았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아니어도 대략적인 시기와 정황은 기억할 수 있었다.

책임자뿐 아니라 말단 수사관의 이름까지 책에 밝혔다. 비교적 직급이 낮은 편(6급)이던 추재엽씨도 그로 인해 기록이 남았다. 
고문·간첩 조작에 가담한 가해자는 모두 이름을 밝힌다는 원칙을 갖고 시작했다. 말단이라도 역사적 책임을 비켜갈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나. 피해자들은 가짜 간첩인데도 실명·사진이 다 언론에 실렸는데 말이다(김씨의 경우도 재판이 열리기 전 보안사가 김씨를 간첩이라고 언론에 공표해 피해를 본 일이 있다. 당시 텔레비전 뉴스에는 여권에 함께 붙어 있던 한 살짜리 그의 아들 사진까지 공개되었다).

2006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추재엽 구청장의 고문 사실을 처음 공론화했다. 추씨를 계속 추적했던 건가?
난 추재엽이라는 이름도 잊고 있었다. 십 몇 년 전 일 아닌가.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진화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를 받으러 한국에 왔다가 기무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추재엽 아시죠?” 하는 거다. 그래서 “누구요?” 되물었더니 “그 금괴 밀수했던 추재엽요. 그 사람이 지금 구청장 됐습니다” 하더라. 그 얘길 들으니 옛 생각이 나면서 기가 막혔다. 

추재엽씨를 위해 탄원서를 낸 옛 보안사 수사관들은 당신을 ‘동료 간첩을 밀고한 배신자’라고 비난하던데.
 1988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내 문제를 처음 추궁했는데, 그때도 보안사 논리는 같았다. 내가 동료를 배신한 공으로 보안사에 채용됐다고. 그런데 말이 되나. 난 그들이 강요하는 대로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을 뿐이다. 일본 지인들을 고발하거나 한국으로 유인한 일은 전혀 없다.

<보안사> 한국어 번역판(위)은 1988년 나온 즉시 전량 압수됐다. 김병진씨는 조만간 이 책을 재출간할 계획이다.

동포 사회는 당신 말을 믿어주나?
 (잠시 복잡한 표정이었다가 목소리가 격앙되며) 일본으로 돌아간 뒤 솔직히 별별 유언비어가 다 있었다. 일부는 내가 직접 고문을 했다는 말까지 퍼뜨렸다. 북한과 가까운 한통련 같은 조직은 처음에는 그러더라. 보안사를 고발할 거면 왜 자기네와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내가 김일성·김정일이라면 질색을 하니까 나중에는 별별 공갈협박을 다하는 거다. 한쪽은 날 간첩이라 하고, 한쪽은 날 남한 공작원이라 하고. 정말 이중삼중으로 구박받았다. 그것 때문에 일본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술도 엄청 마셨다(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의 그의 인식은 에서도 끊임없이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북송이라는 이벤트로 재일동포의 노동력을 착취한 김일성 정권이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한 전두환 정권이나 재일동포를 희생양 삼았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분단된 조국의 최대 희생양이라 할 동포들에게 여전히 일방적 충성을 강요하는 양측 체제의 폭력에 그는 넌더리를 낸다).

25년 전 쓴 책 한 권 때문에 지금도 법정에 불려다니는 신세다. 후회는 없나?
 (보안사)를 안 썼다면 나는 인격적으로 파괴됐을 거다. ‘내가 보안사라는 괴물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그런 자존심이 없었다면 못 견뎠을 것 같다. 그나마 세월이 흘렀어도 그 책이 있어 여러 사람이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지 않나. 거의 다 무죄도 받았고.

그 뒤 보안사에 근무했던 이들을 만난 일이 있나?
 없다. 이번에 법정 증언하면서 1983년 나를 고문했던 수사관이 재판을 참관하는 걸 봤다. 

이야기는 나눴나?
 그냥 보기만 했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묻고 싶다. 혹시 반성해본 적 있냐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본 적 있냐고. 고문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과거 청산이 가능하다. 국가 차원의 사과로는 부족하다. 피해자는 삶이 다 파괴됐는데, 가해자들은 장관에 국회의원 해먹고. 말단은 말단대로 연금 타면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고. 이게 말이 되나? 요즘 고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자는 얘기도 나오던데, 아예 친일 인명사전처럼 고문 전력자 인명사전 같은 걸 만들면 좋겠다. 그래야 고문에 가담하는 사람이 다시는 안 나타날 것 아닌가.

김은남 선임기자  |  ken@sisain.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