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정치 희생양된 비보이의 젊음의 지위


이글은 미디어스 2012-11-29일자 기사 '정치 희생양된 비보이의 젊음의 지위'를 퍼왔습니다.
[대선보도, 비평으로 뚫다]

나는, 그리고 역시나 젊은 그대는,자신의 젊음을 잃기까지 언제나 끝자락 어디에 붙어있는 존재들이다.설설 기어야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맨손의 존재들.
얼마 전 어이없는 사건이 있었다. 모 대선후보를 지지한다는 ‘한국비보이연맹’의 젊은 춤꾼들이 실은 속아서 왔다는 것이다.

▲ 서울신문 2012년 11월 27일자 10면

분명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사기성 짙은 행위가 메이저 정당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쉽게도 박 후보와 캠프의 문제 혹은 열혈 지지자의 사이비 단체 운영 문제점에 대한 성토는 아니다. (성토 좀 한다고 이미 그렇게 살아와버려서 스스로의 삶의 정당성을 위해 되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이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표현하자면 젊은이들이 만만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딱히 도덕적인 문제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양 정당과 심지어 그 정당을 비추는 미디어에서 조차 드러난다.
‘맘 약한 두 분 토론회’와 ‘토론회를 가장한 홍보’에도 이는 드러난다. 두 분 토론회야 워낙 점잖은(혹은 맞선 자리의 조심스러움 같은) 토론이어서, 젊은 층에 대한 문제가 해결‘해줘야’ 할 문제로 다뤄지는 것(즉 젊은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이들이라는 것, 수혜를 배풀어야 할 이들이라는 것) 정도의 시선이 드러났지만, 짜고쳐도 엉망인 ‘토론회를 가장한 홍보’ 쇼에서 이러한 시선은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박 후보는 방청객 질의응답 시간에 대학생이 질문한 ‘진정성’에 대해 ‘너네 돈 없어서 힘들지? 등록금 깍아줄게’로 핀트가 빗나간 답을 한다. 추가로 질문을 하겠다는 대학생의 입을 막고, ‘나는 이미 너네의 이야기를 다 알아’ 라는 태도로, ‘내가 생각하는 너의 문제를 꼭 해결해주겠다’고 말한다. 실재와의 대화가 아닌 이미지와의 대화. 서로 다른 존재들 간의 소통을 위한 대화는 한 토론회와 한 홍보쇼 모두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듣는 것, 들으면서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매번, 모든 존재가 다르다는 사실에, 좌절을 하든 강압을 하든 설득을 하든 신처럼 모시든, 깨닫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게 없다. 떠나간 안철수가 젊은이들을 끌어당겼던 것은 ‘진심’의 표방을 통해 이 스텐스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도 정치적으로 자신의 테두리가 쳐지면서부터 이것이 어렵게 되었다.) 남은 유력 후보 둘은 그 스스로가 짊어진 자신의 정치사적 중요성에 짓눌려, 강고한 자신이 표현될 뿐이다.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달 24일 오후 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 부산시당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위 출범식에 참석해 비보이들의 공연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뉴스1

대선 후보들의 유세 현장에 대한 보도(11월 28일 KBS 9시 뉴스. 유사 이미지가 타 공중파 뉴스에서도 사용되었다.)에서는 이 사회, 특히 정치적인 시각에서 젊은이들이 어떠한 위치에 서있는지 그 편린을 볼 수 있다. 충청도 일대에서의 표심 확보를 위한 양 캠프의 격일 선전전에서, 젊은이들은 양 후보를 지지하는 행사의 빨갛거나 노란 ‘춤꾼’으로 나온다. 마치 젊은이들을 포함한 전 세대가 특정 세대의 후보들과 하나가 된 마냥. 젊은 그들의 언어를 통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비단 그들이 정말 그러하기 때문만일까. 실은 양 후보 진영에서도, 그 진영을 쫒으며 카메라에 담는 주류 미디어에서도, 그들은 그렇게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중요도에서 밀려 편집되었을 이들의 발언 또한 실은, 이미 그들이 발붙인 삶에서 떠난 기성 사회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더더욱 편집되지 않았을까.   
화가 난다. 그런데 특정 후보나 특정 정당-캠프에게만 돌리기에는 이 화가 조금 크다. 기성사회가 젊은이들을 호구로 여긴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젊은이들은 가진 것이 없다. 사회적 영향력도, 재력도, 경력도 없다. 그래서 어딜가나 딱까리 신세다. 커피를 타거나, 복사를 하거나, 생기 넘치는 몸을 팔거나(혹은 춤을 추거나).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서글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인품이 훌륭하고 나이로 차별을 두지 않는 어르신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이건, 단순히 개개인의 윤리나 덕성의 문제가 아닌, 그들이 정말로 가진 것도 지닌 능력도 없다는, 시간에 따른 축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 더 나아가서는 현대인류문명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해결될 수 없는 서글픈 문제이다. 젊은이들이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서 무언가를 축적하게 되는 순간, 이 문제에 대해서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0년대와 80년대를 대표하는, 한때는 젊은이였던 두 진영의 후보들처럼.

송재영 / 정수장학회공대위 활동가  |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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