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평생 모은 1억 절반 날린 85세 김씨, 요즘 폐지로 하루 3000원 벌이


이글은 경향신문 2012-10-27일자 기사 '평생 모은 1억 절반 날린 85세 김씨, 요즘 폐지로 하루 3000원 벌이'를 퍼왔습니다.

ㆍ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한숨과 눈물’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내 돈 돌리도, 내 돈 돌리도란 말이다.”

김순옥씨(85·가명)는 악을 썼다. 영업정지된 저축은행 등으로부터 7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2차 공판이 열린 지난 15일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 들어서는 재판장을 향해 그는 참았던 설움을 토해냈다. 폐지를 주워 먹고사는 김씨의 까칠한 손은 떨렸다. 그 손으로 김씨는 가슴을 쳤다.

“애들 소풍 갈 때 김밥도 못 싸주고, 도시락에 계란 하나 못 넣어주고 모은 돈이다. 그 돈 찾아서 나도 따뜻한 밥 먹고 고기 구워 먹을란다. 노숙자 행세 안 할란다. 나이 팔십이 넘어 뭐 먹고 살라고…. 너희 돈 달라고 하나…. 내 돈, 내가 맡긴 돈 달란 말이다.”


4년 전까지 김씨는 부산 자갈치·국제시장 등에서 생선과 붕어빵 장사를 했다. 그래서 평생 모은 1억원을 부산저축은행에 예금했다가, 이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5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김씨는 예금보험공사로부터 받은 5000만원으로 조그만 방을 얻어 같이 살던 아들을 분가시켰다. 김씨는 아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보다 혼자 살기를 택했다. 다시 장사를 하기에는 몸이 예전같지 않았던 김씨가 할 수 있는 건 폐지를 줍는 것뿐이었다.

요즘 김씨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손수레도 없이 맨손으로 폐지를 줍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초량동 옛 부산저축은행 본점 주위를 돌며 버려진 폐지를 줍는다. 하루 종일 일해 그가 쥘 수 있는 돈은 3000~4000원. “그래도 그거라도 벌어야지 밥을 먹을 것 아이가. 요즘은 다리가 아파서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폐지를) 끌고 다닌다. 그래도 나는 걸어다니니까 낫지. 나이 90이 넘는 피해자들은 걸음도 못 걷는다. 아이고, 언제 해결이 나겠노.”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은 지난해 3월부터 매달 한두 번꼴로 서울로 올라온다.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이유는 국회, 금융감독원 등에서 저축은행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묻고 돌려받지 못한 돈을 되찾기 위해서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에서 김민영 부산저축은행 대표의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있은 뒤로는 법원도 찾아간다. 피해자들이 집회·방청 등을 위해 이날까지 상경한 횟수는 70번이 넘는다. 

피해자들은 이날도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공판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새벽 4시에 출발했다. 피해자들은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전날 밤 옛 부산저축은행 본점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손바닥으로 한쪽 머리를 괸 채 법정 앞 의자에 누워있던 엽지선씨(70·가명). 그는 “어젯밤 10시에 지하철 타고 초량에 갔다가 한숨도 못 자고 올라왔다”고 말했다. 초량은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옛 부산저축은행 본점을 말한다. 엽씨는 부산저축은행에 5000만원을 후순위채로 맡겨 지금까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엽씨가 맡긴 돈은 아들의 결혼 자금이었다. 아들에게 작은 전세라도 하나 구해주려고 했지만 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오는 12월에 결혼하기로 계획했던 아들은 우선 사돈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엽씨는 “사돈이 ‘그냥 이렇게 된 것 내년 봄에 하자’고 말했지만 오래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며 고개를 떨궜다. 

엽씨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눈물을 안 흘려봤는데…. 한 달에 100만원만 가지고 생활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인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엽씨는 요즘 부산 근교의 마늘밭을 찾아가 마늘을 심고 캐는 일을 한다. 밭일이 없으면 부산 녹산 공장단지에 가서 청소해서 받는 일당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엽씨는 “남편도 몸이 안 좋아 누워있다”며 “식당도 젊은 사람들을 써서 우리가 일할 곳이 없다”고 말했다. 

엽씨는 저축은행 영업정지 뒤로 집에도 마음 편히 못 들어간다. 아들 보기가 미안해서다. 엽씨는 “아들이 공장에서 벌어온 거 내가 관리하다가 이렇게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밤색 모자를 쓴 이호석씨(71·가명)는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종이를 지갑에서 꺼내 보였다. 종이에는 ‘373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씨가 지난해 부산2저축은행 영업정지 직전에 받은 번호표였다. 

지난해 2월17일 오전 7시. 이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부산2저축은행에 적금을 넣고 있던 그는 점포로 달려갔다. 이씨가 10분 만에 도착한 부산2저축은행 점포 안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 저축은행 직원은 줄을 선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끄떡없습니다. 오늘도 영업하지 않습니까? 5000만원 이하는 안 빼가야 다 같이 삽니다”라고 설득했다. 이를 지켜보던 이씨는 번호표를 받을까 생각하다가 받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통장이 없었다. 삼형제가 모아서 넣은 적금 통장은 동생이 갖고 있었다. 이씨는 통장 없이 번호표를 받았다가 차례가 지나버리면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가져온 통장을 들고 이씨가 다시 점포를 찾은 시각은 같은 날 오후 2시. 점포 안은 오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선 줄은 이미 점포 밖까지 나와 있었다. 이씨는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밀렸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 번호표를 받았지만 이날 예금을 인출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 오전 8시에 점포로 갔다.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그 앞에 경찰이 서있었다. 이씨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경찰은 이날 새벽 3시부터 영업정지가 돼 줄을 서봤자 인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망연자실했다. 만약 뉴스를 보고 뛰어 갔을 때 번호표를 받았더라면 예금을 모두 인출할 수 있었다. 그는 그날을 회상하며 “제가 어리석었죠. 금융거래를 많이 했으면 번호표부터 받았을 텐데…”라고 탄식했다. 이씨는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그만둔 뒤 40여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5년 전 39.6㎡(12평) 소형 아파트를 마련했다. 이씨가 저축은행에 맡긴 1억원은 부모와 삼형제의 노후를 위해 집을 마련하고 남은 4000만원에 두 동생이 보태 마련한 돈이었다.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중퇴했다는 말을 할 때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평생 번 돈”이라며 허공을 바라보는 일흔 노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이씨는 3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다. 그는 보호받은 5000만원의 이자와 폐지 수거로 생활하고 있다. 요즘 오전 5시에 일어나 아파트를 한 바퀴 돌며 청소를 한다. 아파트 정문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청소하기도 하고, 일반 비닐봉투에 담아 무단으로 버린 쓰레기는 일일이 열어 재활용품 분리도 한다. 이씨는 청소의 대가로 주민들로부터 따로 돈을 받지 않는다. 이씨가 폐지 수집을 하는 것을 아는 주민들은 돈 대신 신문·종이박스 등 폐지와 고물들을 그의 집 앞에 갖다 놓는다. 이씨의 집 안방과 거실은 폐지와 고물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150㎝가 채 안 될 것 같은 작은 키에 마른 체형의 임춘미씨(63·가명)의 사연도 기가 막혔다. 임씨는 부산저축은행에 8000만원을 예금해 3000만원을 못 받고 있다. 임씨는 못 받은 돈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 임씨는 “혼자 집에 있으면 밥도 못 먹고, 울기만 했다”고 말했다. 본부에 가면 다른 피해자들이 “받을 수 있다” “괜찮다”고 위로해줘 그나마 살 것 같아서 본부를 찾는다고 했다.

8000만원은 임씨가 파출부로 일하며 두 아들의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이었다. 임씨는 “(그 돈은) 파출부로 나가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얼굴에 뭐 하나 바르지도 않고 모은 돈”이라며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다 얻어 입은 것”이라고 말했다. 

돈 모을 때의 고생담을 들려준 임씨는 북받치는 설움에 바지를 움켜쥐었다. 자식들 공부를 제대로 못 시킨 건 내 죄라고 생각해 파출부로 일하며 돈을 모아서 결혼할 때 주려고 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울먹였다.

임씨에게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다. 남편은 막노동을 하고, 큰 아들은 현재 한 케이블방송사에서 조명 보조로 일한다. 작은 아들은 지난 봄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야간 근무로 일하다 야간 근무가 없어지는 바람에 해직당해 부산에서 지내고 있다. 임씨는 인터뷰를 하면 사진 촬영을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임씨는 3000만원을 못 받은 것은 큰 아들에게 비밀이라고 했다. 임씨는 “큰 아들한테 얘기하면 ‘나한테 돈 안 주더니 잘했다. 나한테 줬으면 그런 일이 없지’라고 구박할 게 뻔해 말도 못하고 있다”고 눈물을 훔쳤다.

법정 안 방청석 가장 뒷줄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던 이성미씨(49·가명)는 힘없이 법정 밖으로 나와 복도 끝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씨는 9000만원을 저축은행에 후순위채로 넣었다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9000만원은 이씨와 남편이 두 딸의 학비로 모아둔 돈이었다. 이씨의 남편은 어업에 종사한다. 대학생인 두 딸은 커피전문점, 제과점 등에서 아르바이트한 돈을 학비에 보태고 있다. 이씨는 “떳떳하게 가르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니 (애들한테)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 일주일에 한 번씩 파출부 일을 하고 있다.

재판장을 향해 소리치던 김순옥씨는 재판장이 법정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억울함을 성토했다. 여든이 넘은 김씨는 “자식들한테 돈 없다고 얘기도 못한다”며 닫힌 문을 향해 소리쳤다. 김씨의 쉰 목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법정 문 앞에서 이를 지켜보던 젊은 경비원이 아무 말 없이 김씨에게 다가가 김씨의 손에 뭔가를 건네줬다. 경비원이 건넨 건 작은 사탕이었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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