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역대 단일화 성공 땐 대선 승리, 실패 땐 대선 패배


이글은 경향신문 2012-10-30일자 기사 '역대 단일화 성공 땐 대선 승리, 실패 땐 대선 패배'를 퍼왔습니다.

ㆍ올 대선, 2002년과 닮은꼴

역대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는 주로 야당이 즐기는 메뉴였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JP) 총재의 ‘DJP 연합’이 본격적인 시초다. 이어 2002년 16대 때에는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에 성공했다. 두 차례 모두 단일화 후보가 승리했다. 

이번 대선도 2002년 대선과 양상이 비슷하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그해 4월 대선 후보로 선출됐지만 지방선거 참배와 김대중 대통령 아들 비리 등 악재가 겹치면서 지지율이 15%대까지 떨어졌다. 추석을 앞둔 9월17일 한·일월드컵 열기에 편승한 무소속 정몽준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노 후보의 지지율을 상회했다. 

민주당에서는 후보 교체론이 제기됐고, 10월4일 반노·비노파 의원 34명이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을 발족시켰다. 노 후보는 10월31일 “경선을 정식 제안해오면 단일화를 검토해보겠다”고 했고, 11월3일 정 후보 측에 단일화를 공식 제안했다. 

11월9일 공식 협상이 시작됐다. 17일 세부 절차가, 22일 최종 협상안이 타결됐다. 24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뒤 밤 12시 결과가 발표됐다.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였다. 후보 등록일인 25일 바로 직전이었다. 

당초 정 후보 측은 협상을 통한 담판을, 노 후보 측은 당원이 50% 참여하는 국민경선안을 꺼내들어 평행선을 그었지만 노 후보 측이 여론조사안을 수용했다. 다만 여론조사 세부안 확정에 보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측이 “지금보다 늦어지면 단일화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무소속 안철수 후보 측은 “2002년에 비해 이념적 차이가 적은 데다 일정도 늦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성공한 단일화’였던 1997년 DJP 연합은 호남과 충청의 지역 연합이자, 중도를 겨냥한 ‘개혁과 보수’의 이념 연합이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패하면서 자민련과 정책공조가 시작됐다. 1997년 7월 공식 협상에 착수했고, 9월 김대중 총재 비자금 사건이 터지며 수세에 몰리자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11월3일 양 총재가 회동해 단일화에 합의했다. 이로써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동거 정부가 처음 실험됐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독자 출마했다. 11월18일 정동영 후보는 문국현 후보에게 단일화를 제안했지만 문 후보가 거절했다. 11월26일 세 후보가 모두 등록하고 대선운동에 돌입했다. 

12월4일 문 후보가 정동영 후보에게 단일화를 제안하고 양측은 협상에 나섰지만 8일 협상이 결렬됐다. 11일에는 정동영·이인제 후보 단일화도 무산됐다. 범여권 분열 속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역대 최다 표차로 당선됐다.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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