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한 푼도 손해 안 보려는 세상에 이런...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10-26일자 기사 '한 푼도 손해 안 보려는 세상에 이런...'를 퍼왔습니다.
'강화나들길'에서 만난 따뜻한 마음, 헌식

전등사의 명부전 앞 한 쪽에는 양손바닥을 나란히 펼친 것보다 조금 더 넓을 것 같은 평평한 돌 받침대가 있다. 그 받침대 위에는 떡이며 과일 같은 음식물 부스러기들이 놓여 있을 때가 더러 있는데, 처음에는 경우 없는 사람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돌보는 이가 없는 귀신들이나 쥐와 새 같은 미물들을 위해 차려준 헌식이었다.  

지난 겨울의 어느 날 전등사에 갔다가 명부전에 들러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한 바퀴 둘러보고 있는데 돌담 사이의 틈으로 까만 게 쏙 나오지 뭔가. 저것이 뭘까 하며 바라봤더니 새앙쥐 한 마리가 주위를 경계하며 살금살금 머리를 내밀었다. 

쥐는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쪼르륵 나와서 잽싸게 음식물을 물고 돌담 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여러 차례 들락거리던 쥐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만 고개를 돌담 안으로 들이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돌 위에 얹어놓은 음식물의 용도를 알았다. 쥐와 새 또는 미물들을 위한 마음이 그 돌 위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미물도 챙겨주는 마음, 헌식대

'강화나들길'을 걸을 때면 늘 정겨운 마음들을 만나곤 한다. 그 중 선원면 지산리의 '남산마을'에 가면 말없이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나지막한 산 밑에 자리 잡은 그 집은 터가 널찍하고 또 호젓해서 마치 세간(世間)을 벗어난 듯하다. 

고즈넉한 그 집 마당에는 드문드문 소나무들이 서 있고 세월의 더께가 낀 흙집이 한 채 있다. 그 곳에서 쉴 때마다 집주인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화려하게 꾸미고 보태는 게 이 세상의 살아가는 이치인데 이 집은 덧보태는 것은 고사하고 옛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의 한 때 ⓒ 윤국로

뒷동산 한 쪽에는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파라솔 아래 탁자와 의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늘 사탕과 인스턴트 커피까지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쉴 때면 얼굴도 모르는 그 집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절로 감탄을 하곤 했다. 제 것을 챙기고 거두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는 그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런데 그 댁 뒷동산에는 자그마한 논이 한 마지기가 있다. 그 논을 볼 때마다 의아했다. 공원 한가운데 논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누구라도 그리 여겼을 것이다. 더구나 조금은 생뚱맞다 싶게 벼까지 심어놓았으니 도대체 그 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양식(糧食)을 하려고 농사를 짓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 넓은 땅 중에서 하필이면 산그늘이 지는 그 곳에 논을 만들었겠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벼농사를 짓는 이유는 날짐승들을 위한 것이었다. 벼를 추수하지 않고 그냥 두면 산중에 먹잇감이 귀할 때 새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논은 말하자면 자연에 바치는 헌식대였고 벼는 새들을 위한 헌식이었던 셈이다.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세상의 인심인데 그 댁의 주인장은 무슨 생각으로 집을 길손들에게 내놓고 또 논의 벼까지도 새들을 위해서 놔두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경지가 그 곳에는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자연은 배포가 커서 작은 것을 받고 더 큰 것으로 돌려준다. 그러니 그 댁에도 큰 가피(加被)를 내리실 것 같다.

보라색 물똥을 이고 달린다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이 생각난다. 마당 한 쪽에 있는 감나무 밑에 차를 세워두곤 했는데 이상하게 차에 늘 보라색 물똥이 묻어 있었다. 감나무 근처에 있는 머루나무 밑에는 한두 마리의 새들이 날아다니곤 했는데 아마도 범인은 새들이었던 것 같았다. 

머루를 다 따지 않고 남겨뒀더니 새들이 들락거리며 머루를 따먹고 감나무 가지에 앉아 쉬다가 실례를 한 것이었다. 바짝 말라서 오그라든 머루였지만 그래도 한겨울에는 그것도 큰 모이였는지 머루가 다 떨어질 때까지 새들의 발걸음은 멈추지를 않았다. 그리고 내 차는 보라색 물똥을 머리에 인 채 도로를 달리곤 했다. 

▲ 까치밥은 남겨둬야겠지요. ⓒ 윤국로

어떤 날은 이곳 저곳에 어지러이 찍찍 내깔겨져 있는 새똥을 보노라면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니 우리가 새들을 겨울 동안 먹여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들을 위해서 일부러 머루를 남겨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선업(善業)을 쌓을 기회를 주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시를 하고 덕을 쌓았으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우리 집 머루나무는 저절로 자랐다. 이른 봄에 묵은 삭정이들을 잘라줘서 그런지 올해는 다른 해보다 머루가 더 오지게 달렸다. 가을이 깊어가자 머루송이가 새까맣게 익어갔다.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한 알씩 따서 입에 넣고 맛을 봤다. 새큼하면서도 달콤한 게 포도와는 또 다른 맛이 났다.

머루를 딸 때가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까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침내 전지가위를 들고 수확에 나섰다. 손이 닿는 곳은 내가 따고 높은 곳에 달려 있는 것은 남편이 땄다. 그런데 남편은 다 따지 않고 남겨두지 뭔가.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작은 새들의 먹이로 머루를 남겨놓은 듯 했다.

우리 집의 감나무도 가을이 되자 주황빛으로 물이 들었다. 어느 해 한 번 저를 위해 애쓴 적이 없는데도 감나무는 해마다 가을이면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준다. 올해는 내가 먹을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새들을 위해 남겨둬야겠다. 더 큰 것이 내게 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이승숙(onle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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