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포퓰리즘이 무섭거든, 부자들의 미디어가 앞장서라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31일자 기사 '포퓰리즘이 무섭거든, 부자들의 미디어가  앞장서라'를 퍼왔습니다.
[장행훈 칼럼] 안철수 정치쇄신안이 부른 포퓰리즘 논쟁에 관하여

안철수 후보가 23일 발표한 세 가지 정치쇄신안에 대해 정치권 안팎에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편승한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안 후보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포퓰리즘이 대선의 쟁점으로 부상한 느낌이다. 23일 국회의원 수를 백 명 줄이고 세비도 감축해야 하며 국정감사에 참석하지 않는 국회의원은 세비를 자진해서 반납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안철수 후보는26일 경남대학 강연에서 그의 제안이 포퓰리즘에 편승한 것이라는 비판에 “국민의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폄훼하지 말라”고 받아쳤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여론에 미칠 영향을 예감한 반응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이란 말은 데마고지(demagogy-대중선동)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현실적으로 포퓰리즘이 선거운동에서는 필요악으로 남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7년 미국 대선 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만은 오바마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않고 환상적인 포퓰리즘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고 호되게 비판한 일이 있다. 미국 언론은 지난 주 오바마와 롬니의 3차 토론에서 누가 어떤 문제를 포퓰리즘적으로 다뤘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면 포퓰리즘은 선거운동에서 완전히 배제해야 할 악인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내재돼 있는 바이러스와 같다. 완전 금지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지난 2월프랑스의 르몽드도 대선을 앞두고 이 문제에 관해서 지상(紙上) 토론을 벌였다. 포퓰리즘이 대선에 미칠 영향을 예견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소의 역사학 교수 필립 로제, 변호사 벵상 티베리, 미국 프린스톤 대학 정치사상사 교수 얀-베르너 뮐러, 그리고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사상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같은 쟁쟁한 전문가들을 토론에 초청했다. 토론의 결론은 예상 외로 포퓰리즘을 타부시 하는 것보다는 균형있게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전향적인 것이었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지난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선거캠프에서 정책 구상안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토론자들은 포퓰리즘의 개념이 모호하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포퓰리즘은 우익과 좌익 간 또는 온건파와 극단주의자 간의 충돌보다는 인민(대중)과 엘리트가 충돌한다고 했다. 끝으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오늘날 어느 정도의 포퓰리즘을 인정하지 않고는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고 포퓰리즘의 긍정적 기능을 강조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포퓰리즘을 완전히 배제한 선거는 상상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핵심 주역이 인민(people)이며 이 인민의ㅣ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는 수단의 하나가 포퓰리즘(populism)이다. 두 단어는 어원이 같은데도 학자들은 오래 동안 둘을 적대관계로 봤다.
포퓰리즘은 대의(代議)민주주의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다. 인간사회가 커지면서 직접민주주의로서는 관리할 수 없게 되자 찾아낸 대안이 대의민주주의다. 대의제도 하에서도 민주체제의 주역이 인민인 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선언된 인민주권 원칙과 주권자인 인민이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사이에는 현실적인 괴리가 존재한다.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으로 인민은 주권자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대의제도 때문에 여전히 주권자의 권한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했다. 지금은 여론민주주의 시대라고 한다. 국민이 여론을 통해 주권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론은 미디어를 소유한 돈 많은 자본가 대기업이 좌우한다. 대중은 여론을 만들 미디어가 없다. 대중운 포퓰리즘으로 하나로 뭉칠 때 모처럼 주권자의 권한을 채감할 수 있다.
언론이 국민의 여론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니라 1%의 엘리트 이익만 대변할 때 국민은 주권자 행세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제도언론에 무시당한 99%의 국민은 그들의 주장을 표출하기 위해 포퓰리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거국적으로 균형있는 여론 형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금 세계는 1%대 99%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99%는 자기들의 주장을 표출할 길이 없이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도처에서 “평화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은 2011년7월 “포퓰리즘을 생각하자”는 강연에서 포퓰리즘을 통해 인민(대중)의 여론이 반영되는 민주주의 실현을 외쳤다. “20세기가 전체주의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포퓰리즘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재벌언론, 보수의 거대 미디어가 대중의 여론을 무시하고 공익을 위해 봉사할 언론을 사유화하고 있는데 분노한 민중의 “평화적인 반란”이 포퓰리즘에 불을 지피고 있다.
물론 포퓰리즘의 과잉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득권 계층이 포퓰리즘을 위험시만 하는 것도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이제 우리도 무조건 포퓰리즘을 백안시할 때는 지났다. 더구나 그 포퓰리즘이 정치집단이 선동한 것이 아니고 99%의 민초들의 외침을 반영하는 것일 때 그것을 포퓰리즘이라고 폄훼해서는 안 된다. 안철수후보가 분개한 것도 그 때문이라 믿고 싶다. 기득권층이 대중의 포퓰리즘이 두렵거든 부자들의 미디어가 나서서 민초들의 갈망을 메아리치게 해주면 될 것이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 hap36jang@hanmail.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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