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최장집칼럼]개헌정치, 무엇이 문제인가?


이글은 경향신문 2012-10-29일자 기사 '[최장집칼럼]개헌정치, 무엇이 문제인가?'를 퍼왔습니다.

다음 임기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대선이 되면,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나, 경제는 어떻게 하고 교육과 복지에는 어떤 청사진이 필요한가 하는 등의 큰 문제들이 제기되곤 한다. 그럴 때면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진보-보수와 여-야를 초월해 사회 각계의 ‘원로’들이 모여 합동으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개헌이 지금 그렇게 필요한 것인가? 

우선 그 전에 원로들이 집단적 의사를 표명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말하고, 현실 정치를 계도할 사명감을 갖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로들의 개헌 문제 제기는, 스스로 어떤 최선의 국가 목표를 상정하면서, 그에 비해 오늘의 정치와 제도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모든 제도의 근간인 헌법을 바꾸고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를 그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로들의 집단적 정치 행위가 비단 개헌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야권에서는 원로들이 모여 첨예한 정치적 사안마다 의견을 내왔고 최근에는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고 나서기도 한다. 도덕성과 지식, 지혜를 겸비한 원로들이 대중을 계도했던 19세기 서구의 의회주의 시기에서라면 몰라도, 충분히 교육받고 도덕적 자율성을 갖는 보통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현대의 대중민주주의에서 그러한 정치적 후견자들의 역할이 적절한 것인지, 나아가 정치발전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한 사회와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하고 정의하는 것은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 역사는 시민이 쓰는 것이다. 그런 정치 밖에서 혹은 정치의 상위에서 정치를 이끌 최선의 대안을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원리 위에 서 있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하기 어렵다.

민주정치의 발전을 위해 ‘정당을 바로 세우는 길’과 ‘헌법을 바로 세우는 길’ 사이의 선택을 해야 한다면, 필자는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당은 정책을 입안하고 공직 후보를 선정하여, 시민과 정부를 연계하는 대표와 책임의 고리를 만드는, 민주주의의 중심 조직이자 메커니즘이다. 좋은 정당이 없다면 좋은 정치도, 좋은 민주주의도 없다. 

헌법이 잘돼서 정치가 잘 될 수 있다고 한다면, 해방 후 한국 정치가 최고로 좋았어야 했다. 최초의 한국 헌법은 당시 가장 좋은 민주주의 헌법이라고 할 미국 헌법과 독일-오스트리아 헌법의 좋은 점을 취합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헌법 1조는 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으로 시작했기에 그 헌법 아래에서 권위주의 통치도 없어야 했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헌법은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권력을 조직하고 배분하는 경쟁의 기본 틀과 절차를 제공할 뿐, 그 자체가 좋은 정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몫이고,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이끄는 것은 정당이다. 

현재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더 중요하게 논의돼야 할 것은, 있는 헌법도 지켜지지 않는 정치적, 사법적 현실이라 하겠다. 기존 헌법이 지켜지기만 해도 법 앞에 평등과 법의 지배가 상당 정도 실현될 수 있다. 재벌의 전횡과 대통령의 권력남용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인위적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일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지 않도록 하거나,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다양한 사회적 이익과 열정이 정치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도 있다. 대통령이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권력과 책임을 분점하여 정당을 강화하는 환경을 만들 수도 있다. 지금 헌법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을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가치가 확대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고 그러한 경험을 축적해 가는 데 있지, 헌법 탓이 아닌 것이다.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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