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김종인이 경제민주화 기수? 신군부 부역자들의 괘씸한 ‘거짓말’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10-28일자 기사 '김종인이 경제민주화 기수? 신군부 부역자들의 괘씸한 ‘거짓말’'을 퍼왔습니다.
[그들의 경제민주화는 허구다-②] 새삼스런 저작권 주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박근혜 후보의 경제정책 방향타를 잡고 있는 김종인 씨는, 보수언론에 의해 경제민주화의 '기수'니 '원조'니 하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가 헌법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은 당사자란 것이다. 그래서 김종인을 '반재벌'이나 '재벌 저격수'라 말하기도 하고, 어느새 진보개혁 언론들조차 이 조항을 '김종인 조항'이라 부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 보도는 명백한 거짓이긴 하지만, 일단은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의 기수'라는 속설의 발원지를 따라가보자. 

경제민주화의 장본인과 목격자?

87년 개헌 당시 김종인은 민정당의 전국구 재선의원이었다. 그는 박정희 때는 경제개발계획 실무위원, 전두환 때는 광주학살 직후 설치된 국보위를 거쳐, 이후 민정당과 민자당에서 3선 의원을, 그리고 노태우 때는 청와대 경제수석 및 보건사회부 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다. 

김종인이 재벌의 반발을 물리치고 전두환을 설득해 경제민주화 조항을 관철시켰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남재희 씨다. 그는 '창작과 비평' 2002년 겨울호에 기고한 글(대선과 정치개혁의 큰 틀:나의 체험적 한국정치론)에서, 119조 2항을 '김종인 조항'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양지웅 기자 새누리당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24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제민주화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인즉 "이 조항은 미국식으로 말하면 김종인 조항이다. 미국에서는 법안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학계나 언론계의 관례가 아닌가. 6.29선언 후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이 있을 때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종인 박사가 이 조항을 성안하고 그대로 관철시키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는 것이다. 

이 '증언'에 대한 의구심 때문인지, 2002년 당시엔 이에 호응하는 언론이 없었고 남재희의 '증언'도 한동안 잠잠해진다. 그러다 2006년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이라는 자서전에서, 남재희는 재차 같은 목격담을 내놨고, 이후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의 기수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인도 같은 주장을 시작한다. 오랜 여당 생활을 접고 2004년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긴 김종인은, 2005년이 되자 자신이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고백'한다. 당시 언론을 보면 스스로를 경제민주화의 '장본인'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김종인의 적잖은 노력을 알 수 있다. 

"내가 헌법 119조를 보강한 장본인인데,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2005년 6월 금산법 토론회)

"언젠가는 삼성과 같은 재벌이 국가권력에 정면 도전하는 일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 1987년 제9차 헌법개정 때 제119조에 '경제의 민주화' 조항을 만든 것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였다"(2005년 7월 한겨레 인터뷰)

남재희는 누구인가

여기서 찬찬히 들여다 볼 대목은, 김종인의 증인이 되어 준 남재희가 누구인가다. 남재희는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낸 언론인 출신으로, 80년 신군부의 언론장악 정책에 부역했고, 이후 민정당에서 민자당으로 이어지는 4선 의원과 노동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남재희와 김종인은 여러모로 밀접하다. 전두환 국보위를 거쳐 정치에 입문한 것이 똑같고, 민정당과 민자당으로 이어지는 다선 의원이란 점도 서로 통한다. 뿐만아니라 남재희 스스로가 밝히듯, 두 사람은 반독재 시위대의 민정당 점거농성을 피해 함께 "소주를 기울이며 정국 이야기를 하고" 전두환의 별장 청남대에 "중간보고"를 하러 다니던 사이다. 

두 사람의 친소 관계와 정치적 이력만 봐도 남재희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또한 남재희는 1980년과 그 이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도 '미화'에 가까운 서술을 하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박찬종은 87년 헌법개정 논의 당시, 제1야당 통일민주당의 개헌특위 간사였다. 최근 그는 여러 방송과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새누리당의 저작권 요구를 비판했다. 그는 "(야당이 만든)초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고 국민투표로 확정됐는데 25년이 지나서 난데없이 김종인씨가 '내가 했다'고 말하니 원조가 돼 버렸다"며 김종인의 행태에 대해 "아주 꼴사납다"고 말했다. 

신한민주당 개헌특위 전문위원이었던 이석현 현 민주당 의원도 "87년 개헌은 전두환 정권이 국민의 6월 항쟁에 항복해 이뤄졌기 때문에 개헌의 주도권은 야당이 쥐고 있었다. 여당인 민정당은 바짝 엎드린 채 야당의 개헌안을 그대로 받아 통과시키는 역할만 했다"며 "김종인 전 의원이 만들어 넣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한 저작권 주장의 의도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정당과 김종인은 87년 민중항쟁과 그 힘을 업고 개헌안을 제출했던 야당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김종인은 오히려 87년 당시 "재벌의 경제력 집중 등 경제에 관한 규제조항을 헌법에 명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경제민주화 관련 조항 삽입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설사 김종인이 전두환을 설득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그가 87년 당시 전두환 체제 내부의 온건파였다 하더라도,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의 기수라는 주장은, 6.29 선언을 내놓은 노태우를 민주화의 기수라고 말하는 것처럼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사독재 부역자들이 새삼 '경제민주화 조항'의 저작권을 요구하는 의도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정치민주화엔 '원죄'가 있어도, '경제민주화엔 기여한 바가 있다'는 인식틀을 만들기 위함으로 보인다.이는 "아버지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라는 박근혜 씨의 정치적 행보 및 보수 학계에서 진행되는 역사 재평가 작업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87년 전후의 역사적 사실을 길게 되짚을 필요는 없다. 역사적 사실은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6월 민중항쟁의 파상공세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당시의 민중진영 및 야당과의 타협안으로 대통령 직선제 등의 개헌안을 냈고, 이 개헌안은 87년 10월 국회를 통과한다. 

그해 6월과 7~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분출된 민중의 요구엔, 미군정에서 전두환까지를 관통하는 노동정책 그리고 일해재단 사건을 비롯 정권과 재벌의 유착 등, 경제영역에서의 '배제'와 '부정의'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다. 물론 이같은 경제민주화 요구는 87년 이후에도, 그리고 개혁적 보수세력인 DJ의 집권 이후에도 좌절만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이른바 '민주정부'들이 그 저작권을 주장하는 속내도 고약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경제민주화론의 허구성은, 전두환 정권과 정치적 명운을 함께했던 학계와 언론인 출신의 두 보수정치인이, 한 명은 자신을 경제민주화 '유공자'로, 또 한 사람은 경제민주화의 '목격자'로 자처하는 데서 그 정점을 이루고 있다. 


이 기사와 관련기사
  • 세 후보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세 가지 질문
문형구 기자 munhyungu@daum.net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