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박근혜 '국민대통합위'는 박정희 용어


이글은 프레시안 20110-30일자 기사 '박근혜 '국민대통합위'는 박정희 용어'를 퍼왔습니다.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23) 정치적 유전자의 증거

계엄령 하 찬반토론 금지된 채 실시한 유신 국민투표는 무효국민기본권 박탈…국회 행정부 사법부의 3권분립 파괴


박정희의 1인 종신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유신체제는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제거됐는데도 종식되지 않았다. 박정희가 키워놓은 군부내 친위대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 집단이 내란을 일으켜 국권을 찬탈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유신체제가 얼마나 강고했는지 보여주는 한 지표였다.


유신체제는 수립과정부터 위헌이었고 집권세력의 체제폭력이 난무하는 불법천지였다.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는 것 때문에 개헌의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국민투표 과정이 부정선거였기 때문이다. 우선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발동한 불법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에게 군 동원의 공포 분위기를 주면서 투표했으니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압 투표였다. 게다가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전면 금지된 상황이었다. 국민투표의 내용에 대해 언론도 비판적인 보도가 금지됐다.


군대와 공무원, 관변단체들은 국민투표 95% 찬성운동을 벌였다. 군 영내 투표는 찬성을 강요하는 공개투표였다. 당시 군에 강제징집돼 있던 나도 공개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중대 인사계(상사)가 행정반에서 찬반이 인쇄된 기표용지 중 반대란을 손으로 가려 쥔 채 찬성란 만을 차례로 들어오는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나는 투표를 거부했는데도 개표 뒤 우리 중대에 기권이 한 표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행정반원이 대리투표를 한 것이다.


또 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intermediate group)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측이 어용 학자 두어명에게 맡겨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는 언론의 비판도, 국민의 찬반토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이 모두 90% 이상이었으며, 그 1년여 뒤 재차 실시한 국민투표에서도 압도적인 지지가 나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겼다. 국민은 현명하고 위대한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성찰적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결여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치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나 이태리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모두 대중민주정치를 통해서 등장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위기와 회의론이 대두됐던 것과 같은 경험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다.


유신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조항과 구속적부심제 등을 폐지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바탕인 시민적 자유를 부정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에 해당한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헌정으로 국민을 옥죄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 분립에 어긋난다. 권력 분립론은 절대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사회계약론자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그런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며 그 결과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으로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를 남겼다.

▲ 1972년 11월21일 유신헌법안 국민투표에서 박근혜 후보가 투표하는 모습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지켜보고 있다. 대통령의 '큰 영애'인 박근혜 후보는 대학생으로서 이 투표 사진이 도하 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됐으며 당시 가장 강경한 저항세력이던 학생운동권과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다.

'국민통합''총력안보''국민총화'는 전체주의 용어갈등 해소를 전제하지 않는 통합은 독재 시대의 대중조작 수법

박정희 유신체제는 유난히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총력안보'니 '국민총화', '일치단결'과 같은 용어들이 난무했다. 이런 용어들은 후진국 독재권력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대중조작 수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출마선언부터 국민대통합을 내세우더니 급기야 선거캠프에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했다. "5.16은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말했다가 국민여론의 지탄에 직면하고 지지율이 급락하자 사과연설과 함께 긴급 대처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재정치에 대해 사과하면서 박정희식 대책기구를 설치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든 갈등이 다 나쁘지 않은 것처럼 맹목적 통합이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통합은 갈등 해소가 그 전제조건이 돼야 한다. 갈등과 비판의 목소리는 제대로 해소시키지 않은 채 무조건 단결과 총화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독재권력의 특성이다. 박정희가 총력안보와 함께 국민통합을 내세운 근거는 북한의 위협이었다.

유신체제는 대통령 박정희가 그 이전에 견지하던 경제 제일주의로부터 국가안보 지상주의로 전환한 억지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이후 취약한 정통성을 가난 추방과 조국근대화를 내세워 정당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경제 제일주의가 70년대 들어서는 권력 강화의 명분으로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북한의 남침 위협론과 함께 남북통일의 명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삼선개헌 때부터 '총력안보'를 구호로 내걸면서 사회 전반을 병영국가 체제로 조직화했다. 대학에도 군사교련을 설치했다. 처음엔 교양과목으로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군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주었다. 그러다 1971년부터 대학 교련은 모든 재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마수를 드러냈다. 이젠 군 복무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려면 모두 교련과목 학점을 따야 했다. 대학에 교련 교관단이 들어섰고 이들은 필수과목 강의 형식을 빌려 학생들에게 안보강연도 했고, 정권에 대한 옹호 발언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또 향토예비군을 더 강화해 각 직장마다 예비군을 설치했다. 예비군 연대장이나 대대장으로 예비역 대령과 중령들이 각 직장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비상기획관 노릇까지 맡기도 했다. 군 고위장교들이 전역한 뒤 사회 곳곳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했다. 박 정권은 유신쿠데타 준비기에 해당하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병영체제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는 누가 보아도 세계적으로 냉전적 대립구도가 해소돼 가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1960년대 말부터 탁구 친선경기 선수단을 주고 받으며 핑퐁 외교로 데탕트에 합의하고 교역과 관광 등 교류를 확대한 끝에 국교정상화를 이룬 시기였다.

타임지, 박정희의 비상사태 선언에 "상상적 비상일 뿐"이라 조롱

박정희는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적 냉전체제의 와해 분위기를 이른바 '국지(局地)안보 위기론'이라는 궤변으로 뒤집었다. 강대국 간의 데탕트는 그 아래 약소국 간의 국지전을 부추기는 역작용으로 나타난다는 억지였다. 남북한을 각각 지원하는 열강인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북한의 군사행동에 대한 보복조치를 막아주기 때문에 한반도 국지안보는 더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1971년 10월15일 위수령과 12월 국가비상사태에 이어 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한 당시 북한의 태도는 긴장완화 분위기가 역력했다. 71년 한 해 동안 북한에 의한 휴전선 침범행위는 종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고,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이어 72년 5월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의 밀사로 평양에 밀행해 김일성을 만나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다. 박정희 밀사의 평양 밀행이란 북한 쪽에서 응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은 뻔하다. 그 결실로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3대 합의문서 중 하나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으며 그것에 바탕해 남북조절위원회가 발족했다. 분단 후 첫 남북간 합동기구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위협설과 국지안보 위기론을 제기하며 국가안보를 수호하기 위한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공식화한 유신체제를 세운 것은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한 격이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1971년 12월20일자 아시아면에서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근거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타임지는 박정희의 비상사태 선언에 대해 '상상적 비상(imaginative emergency)'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남북조절위원회가 기능을 상실한 것은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이어 12월 김일성이 이른바 주체헌법을 제정하여 양쪽이 똑같이 1인 중심 독재권력을 강화한 뒤의 일이다. 그 이후 남북관계는 상당 기간 7.4남북공동성명 이전의 긴장관계로 후퇴하고 말았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용 유신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남북관계를 이용한 결과였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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