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06일자 기사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결성과 활동 언론과 권력 (56)'을 퍼왔습니다.

▲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현판식(1983년 9월 30일), 왼쪽이 김근태 의장, 오른쪽이 장영달 부의장.
전두환 정권은 언론 통폐합과 언론기본법을 통해 여론을 권력에 유리하게 조작하는 길로 치달았다. 그러나 제도언론을 장악한다고 해서 학생, 농민, 노동자, 빈민, 문화예술인 등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특히 1980년의 5월 항쟁이 표면적인 패배로 끝난 뒤 많은 대학생들은 사회 변혁을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학생의 상징처럼 되어 있던 배지를 떼어 던지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단순히 기층민중을 계몽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면서 아픔을 나누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젊은이들이 대학가와 노동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면서 싸우던 1980년대 초반에 재야의 기성세대는 전두환 정권의 철권정치에 짓눌려 과거의 투지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해 넘게 계속되던 그들의 침묵은 1983년 9월 말에 깨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반군사독재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중심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고 뜻을 같이 하는 청년들을 모은 것이었다. 조성우, 이해찬, 이범영 등 진보적 청년들은 그해 9월 30일 민청련 창립대회를 열고 김근태를 의장으로 추대했다.
민청련은 당대의 현실을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파 악했다. 또 민청련의 주체로서 민주청년들의 역사적 임무는 ‘민중운동의 흐 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노동자, 농민들과의 연대를 강 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212~213쪽)
민청련은 5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그 뜻을 이어받는 사업을 펼치는 한편 농민, 노동, 종교, 언론 등 부문운동을 함께 묶어 강력한 반군사독재 전선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1984년 3월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이하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1980년 여름 신군부의 언론인 대량 해직 때 현장에서 쫒겨난 김태홍, 노향기, 이경일, 홍수원, 정상모, 고승우, 현이섭, 이영일, 박우정, 표완수 등 여러 언론사 출신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뭉친 것이다. 1975년 3월 동아·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된 언론인 145 명이 참여한 동아·조선투위에 이어 대규모 재야언론단체가 태어난 것이었다.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는 ‘창립선언문’에서 ‘민주화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하며 언론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국민 각계각층의 침해당한 생존권에 대한 정당한 회복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부당해직된 언론인들은 즉각 원상회복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의회는 1989년 6월 22일자 2호에 1980년 해직언론인 명단을 싣고, 전두환 정권 시기에 본인의 의사에 반해 언론사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협의회는 8월 18일 실행위원회를 열어 회장에 최일남(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총무에 최형민(전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을 뽑고 부산·경남지회 등 전국 8개 지회의 집행부 명단을 발표했다.
협의회는 9월 8일 전국 지회장 회의를 열고 그해 정기국회 중 특별법 제정 을 위해 해직언론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허문도, 이상재, 이원홍, 권정달 등 해직원흉 5인을 해직언론인 전체의 이름으로 고소하기로 했다. 또한 특별법 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여·야당 총재와 원내총무, 그리고 국회 문공 위원 등을 직접 면담하고, 필요시 해직언론인 가족까지 동원하여 원상회복 촉구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후 최일남 회장을 중심으로 한 협의회는 ‘해직언론인 원상회복 특별법 제 정 촉구 서명운동을 벌여 해직언론인 526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어 협의 회 의장단은 여·야 당직자와 국회 문공위원장 및 위원들을 면담해 특별법 입법을 촉구했다. (·····)
협의회의 줄기찬 노력이 결실을 맺어 10월 23일 야 3당과 무소속 의원 165 명은 80년 해직언론인의 보상 및 복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 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반대로 상정되지 못 했고 이후 3당 합당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빛을 보지 못했다.(고승우, ‘6공하의 80년 협의회 투쟁’, , 224쪽)
협의회가 1990년 2월 19일에 발표한 성명서는 1980년 여름의 ‘언론인 대학살’ 이래 해직언론인들이 어떤 고난을 당하면서 어떻게 활동해 왔는지를 여실히 알려준다.
참으로 길고도 서러운 세월이었다.
1천 명이 넘는 언론인들이 전국의 신문·방송사에서 해직당한지 어언 10년, 그동안 우리들은 당국의 감시 아래 생존권을 짓밟혀 왔으며 몇몇 회원은 해직의 충격과 상처로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는 88년 11월 전두환 씨의 사죄와 노 대통령의 약속을 믿고 원상회복 의 그날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공무원뿐만 아니라 정부 투자기관·은행·증 권회사 직원 등에 이르기까지 ‘해직공직자 특별법’에 따른 보상 절차가 완 결됐지만 우리 해직언론인들만은 아직도 7백 명 이상이나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정기국회 때 통과됐어야 할 ‘80년 해직언론인 복직·보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정부·여당의 억지논리에 부딪혀 빛을 보지 못했다. (·····)
누가 뭐라 해도 80년 언론인 대학살의 본질은 전두환 씨를 정점으로 한 5 공 핵심들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저항세력을 제거하려는 첫 시도였다.
이 같은 사실은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허문도를 비롯한 수많은 증인들에 의 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런데도 민정당은 해직사태의 책임이 언론사에 있 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고 해직언론인은 사기업체의 피고용자이므로 정부 가 보상해 줄 수 없다며 억지논리를 펴고 있다. (·····)
민주사회는 언론자유의 확고한 보장 위에서만 존립한다. 모든 독재정권이 예외 없이 언론자유를 탄압하고 정의로운 언론을 박해하는 것은 언론이 자 유로우면 독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아·조선 사태 및 80년 해직언론인들의 원상회복은 잃어버린 언론정신의 회복이자 민주언론 실현의 시발점이다.
한국언론사에 오욕과 수치로 얼룩진 한 시대를 청산하고 참언론, 새언론의 이정표를 마련하자.
그때 한국언론은 거듭나고 조국의 민주화 기반도 튼튼해질 것이다.(앞의 책, 225~227쪽)
한국기자협회는 1991년 1월 17일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해직언론인 원상회복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진위는 1차 사업으로 1970년대 이후 언론인 해직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백서 발간 작업을 시작했다.
1993년 4월 26일, 현역 언론인 5천여 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 되었는데, 그 내용은 75·80년 해직언론인 복직 및 보상기준 등을 명문화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해직언론인 원상 회복을 위해 해당 언론사들을 상대로 중재를 하겠다고 약속한 뒤 성의 있 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해직언론인 원상회복에 관한 법률은 제정되지 않았다. ‘민주 정부 10년’도 해직언론인들에게는 냉담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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