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1일 금요일

메이지 정부도 “독도는 조선 땅”


이글은 시사IN 2012-08-31일자 기사 '메이지 정부도 “독도는 조선 땅”'을 퍼왔습니다.
독도가 조선 땅이었다는 증거는 일본에 더 다양하고 확실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일본 고문헌뿐 아니라 메이지 정부도 독도를 조선 영토라고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8월10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겨온 일본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이번 일의 유탄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하나는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 3·4위 결정전에서 박종우 선수가 펼친 ‘독도 세리머니’다. 올림픽에서 금지된 출전 선수의 ‘정치적 메시지’ 표명을 대통령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지만, 행여 선수의 메달이 박탈되기라도 한다면, ‘바람’을 넣은 대통령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다른 하나는, 여야의 유력 대선주자인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측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측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도 관련 발언을 놓고 벌인 설전이다. 문 후보가 “1965년 (한·일 수교협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에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섬을 폭파시켜서 없애버리고 싶었다고 말했다”라면서, 박 전 대통령을 비판한 것은 8월2일이었다. 왠지 그때는 잠잠히 지나갔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뜨거운 화제가 된 8월10일 저녁, 박 후보의 대변인이 반박을 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이 발언은 일본 측에서 한 것”이라나. 


이번 연재의 주제와 책을 황급히 바꾸었으니, 유탄은 나에게도 튀었다. 그런데 독도에 대해서라면 2008년 이맘때, 다른 지면에 한 번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원인 제공자는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그해 7월14일, (요미우리 신문)은 같은 달 9일에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 때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일본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하겠다고 통고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는 특종을 실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외무성이 부인하고, 한국 외교부가 요청했음에도 끝내 정정기사를 내지 않았다. 

독도 문제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 총괄적인 소개서라면 신용하 교수의 (신용하의 독도 이야기)(살림, 2004년)를 따라올 게 없다. 문고본이라는 작은 부피이지만, 고대사와 근대사는 물론이고 현대사까지 통틀어 독도의 역사를 조감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기회에 독도 문제를 떼고 싶으시면, 역사적·지리적·국제법상의 모든 난문제를 조목조목 밝힌 이 책부터 읽는 게 좋다.  


(삼국사기)에 신라의 우산국 병합 기록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이 신라에 병합된 때부터 독도는 한국의 고유 영토가 되었고, (삼국사기)의 두 곳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일본은, 독도는 우산국 영토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1481년)을 증보한 (신동국여지승람)(1531년)에는 우산국이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나와 있으며, (만기요람)(1808년)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라고 써 놓았다. 일본 어부들은 1870년대 말까지 독도를 송도라고 호칭했다. 또 일본은 앞의 주장에 잇대어, 조선이 독도의 실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강변한다. 을 들출 필요도 없이, 울릉도 고지에서 독도가 육안으로 보인다는 것만으로 일본 측의 주장은 반박되고도 남는다. 맨눈으로 보이는 섬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신용하의 독도 이야기)는 독도가 조선 땅이었다는 증거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다양하고 확실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기대 밖의 역설을 보여준다. “독도를 기록한 일본 고문헌들로서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고문헌은 독도가 한국 영토이고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다가, 일본의 고지도는 하나같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섬으로 명기하고 있다. 일본의 의도에 반하는 이런 자료는,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는 메이지 정부 때에 더욱 풍성해진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1905년 이전까지는 외무성, 내무성, 태정관, 육군성 막론하고 독도를 조선 영토라고 명확히 인지하여 재확인”하고 있다. 

<신용하의 독도 이야기>신용하 지음살림 펴냄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가 울릉군에 속한 한국 영토임을 재공표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러·일 전쟁 중인 1904년 독도에 감시탑을 설치했고, 1905년에는 내각회의를 거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그런데 당시의 일본 정부는 그 사실을 관보가 아닌, 시마네 현의 현보에 싣는 ‘꼼수’를 부렸다. 일본의 저술가 나이토 세이추는 (한국학술정보, 2011년)에 이렇게 썼다. “이 조치는 분명히 비밀리에 이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국제법에 비추어 ‘유효하게 실시되었다’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공시였다.”


“독도 문제는 미국의 대일 전략에서 파생”

20세기 초에 시작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독도 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영토적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일제의 패망은 독도 반환으로 자연스레 이어져야 했으나, 그 과정에는 곡절이 많다. 신용하도 자신의 책 말미에서 이 문제를 꽤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정병준은 아예 1945~1953년의 현대사만 가지고 1000쪽에 가까운 (독도 1947)(돌베개, 2010년)을 썼다. 지은이의 견해와 핵심은 “독도 문제가 한·일 간의 문제이거나 역사적 영유권, 지리적 문헌의 문제라기보다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을 기점으로 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동북아 전략, 특히 대일 정책의 부산물로 한미·미일 관계에서 파생되었다”라는 데 있다. 이 책의 전문성과 두께가 부담스럽거나, 그보다는 박정희의 ‘독도 폭파’ 발언의 진위가 더 궁금하다면 노 다니엘의 (독도밀약)(한울, 2011년)을 필독해야 한다.   

이제껏 일본의 독도 도발은 시마네 현이나 소수의 극우 세력이 주도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일본은 교과서·외교청서·방위백서 등을 통해 ‘독도는 일본 땅’을 전력으로 외쳐왔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끝나지 않는 경제 침체와 군국주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일본 사회의 보수성이 결합해 국수주의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과 ‘레임덕 만회’라는 비웃음을 스스로 짊어지면서 후임 대통령의 고민을 덜어준 것은 잘한 일이다. 이번 일로 일본은 수가 궁해진 반면, 한국은 작심하고 굳히기만 하면 된다. 일본이 남한과 북한 사이를 현명하게 오갔다면, 이런 때에 ‘북한 카드’로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장차 그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독도에 1인용 집필실을 만들어, 작가를 몇 달씩 상주시키는 것은 한국이 써볼 만한 방법이다. 그럼 나도 간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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