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탈출하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30일자 기사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탈출하다'를 퍼왔습니다.
[새 연재] 장준하는 누구인가 (3)

▲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왼쪽부터)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찍은 사진. 이들은 일본 학도병으로 징병됐지만, 병영을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장준하가 속해 있던 부대에서는 조선인 학도병들의 탈출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그가 평양에서 그리 옮긴 지 3개월 반 만에 학도병 전원이 쓰카다부대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장준하는 그동안 익혀 두었던 지리와 지형이 못내 아까웠지만, 다행이도 쓰카다부대까지 함께 오게 된 내무반장 우에다가 중대 간부들 앞에서 그를 따뜻하게 대해준 덕분에 모범적인 조선 학도병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쓰카다부대는 단 한 사람의 탈출병밖에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그 한 사람조차도 부대 본부에서가 아니라 전선의 파견대에서 탈주한 것이었다. 그만큼 군율이 엄하고 감시가 삼엄한 부대였다. 그런 부대라 그런지 조선인 학도병들 가운데는 비굴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참병인 일본놈들이 외출 갔다 돌아오면 매식으로 배부르니 별로 병영 음 식이 먹고 싶지 않아 계란을 깨어서 비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선심 쓰듯 밀어 던져주는 밥 한 그릇을 더 받아먹고자 혈안이 된 우리 동료들, 그나마 도 대학교육을 받다 입영했다는 처지에······. (······) 보다 못해 나는 몇 친 구들에게 말하여 잔반불식동맹(殘飯不食同盟)까지 만들었다. 일본놈들이 먹 다 남긴 밥찌꺼기는 먹지 말자는 이 동맹은 배고파 창자가 뒤틀리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자존심만은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때 우리나라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던 모 장군도 사실은 나와 같은 동료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동료로 보기에 가슴이 아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잔반불식동맹’ 을 만들어 그의 자존심을 길러주자고 했건만 그것은 허사가 되어버리고 만 슬픈 기억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친구는, 고참병이 먹다 남은 밥을 던 져주면, 그릇째로 뺏기 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두 손을 밥그릇에 넣 어 먼저 밥만을 움켜쥐고 돌아서서 그 더러운 밥을 먹곤 했다.(, 26~27쪽)
장준하는 밤낮으로 전투훈련에 시달리면서도 휴식시간이면 교관 옆에 다가앉아 ‘적(중국군)’의 상황을 물어보면서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동북방 120리 지점에 중국군이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아냈다.
“당시 중국 대륙에 퍼져 있는 중국군은 그 갈래가 많았다. 충칭에 정부를 두고 있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과 모택동의 공산군이 있고, 그리고 왕정위군이란 게 또 있었다. 왕정위는 중국 국민당의 중심 인물로 장개석과 함께 손문을 보좌하다가 손문 사후 장개석과 대립하다가 결국 중경을 탈출해서는 대일(對日) 화평을 구실로 남경에 친일 괴뢰정부를 세우고 군대까지 가지고 있었다.”([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99쪽)
치밀하게 탈출을 준비하던 장준하는 그 사실을 아내 김희숙에게 은밀한 문구로 알렸다.
벌써 며칠 전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때와 달리 짤막한 사연을 엽서 한 옆에 적고 그 끝에 ‘로마서’ 3장 9절을 인용했다. 나의 손은 떨리 고 있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는 구절이다.
가만히 엽서를 내 뺨에 비벼대었다. 나의 체온이 묻어나 나 살던 곳으로 전 해질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내 감상이 이렇게 해서 위로될 수도 있다는 무 의식이 나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돌베개], 32쪽)
1944년 7월 7일, 장준하와 동지들은 마침내 일본군 탈출을 감행했다. 그날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한 ‘지나사변’ 발발 7주년 ‘기념일’이었다. 일본군 전체가 그랬듯이 쓰카다부대에서도 질탕한 잔치가 벌어졌다. 훈련이 일찍 끝나자 내무반들에는 ‘천황’이 하사했다는 술과 담배가 돌려졌다. 병영 안은 노래와 춤으로 시끌벅적했다.
오래 전에 장준하와 함께 탈출하기로 약속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해온 학도병은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이었다. 그들은 탈출에 대비해서 그동안 준비해온 배낭, 나침반, 성냥, 그리고 약간의 식량과 수통을 다시 점검했다.
저녁 점호시간이 되었지만 병사들이 만취해서 점호가 불가능해지자 주번사관이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15분 이내에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서 취침해라. 오늘 저녁엔 야간학과는 중지한다. 점호 끝.”
밤 9시 10분, 장준하와 동지 세 사람은 비밀리에 마련해둔 행장을 목욕대야에 넣고 내무반 밖으로 나갔다. 네 사람은 부대 철조망 바깥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개약진’을 했다. 장준하의 귓전에서는 “탈출하다 붙잡히면 일본도로 목을 쳐서 연병장에 내걸고 본보기로 삼겠다”고 위협하던 일본군 장교의 말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장준하는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기면서 3m 높이의 철조망을 기어 올라서 넘었다. 적어도 부대원들이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기 5분 전까지는 세 동지와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구마밭 고랑을 타고 달려 옥수수밭에 이르렀다. 세 동지는 이미 거기 모여 있었다.
장준하 일행이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험준한 돌산을 기어서 중턱에 이르니 시원하게 트인 사방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동이 트기 전에 일본군과 맞서고 있던 왕정위 군대의 진영까지 접근해야만 했다. 일행이 돌산을 내려가 자 뜻밖에도 운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윤경빈이 운하로 들어가서 가늠해보니 물이 가슴까지만 차올랐다. 그러나 전혀 헤엄을 치지 못하는 장준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너비가 20m밖에 안 되는 운하를 천신만고 끝에 건넜다. 그들은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성냥이 물에 젖어버려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은 동북방향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수수밭을 달려나갔다.
먼동이 트는가 했더니 얼만 안 있어 날이 밝기 시작했다. 파김치가 된 장준하 일행은 조밭에 숨어 그날 낮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다른 세 동지는 눕자마자 코를 곯았지만 장준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조 포기들을 뽑아 그들의 몸을 덮어준 뒤 한참만에야 잠이 들었다. 잠에 빠졌던 그들은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해 눈을 떴다. 바로 그때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이 탈출한 사실이 발각되자 일본군이 중국 주민들을 동원해서 벌판을 뒤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조밭에 납작 엎드렸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율라, 메율라(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어)” 하는 소리가 조밭 너머 수수밭에서 울렸다. 수수밭을 나와서 네 사람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중국 청년 두서너 명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그리고 뒤에 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의 중국청년이 우리가 누워 있는 조밭의 한쪽 끝으로 약 30m의 거리를 두고 지나가 주었다. 대지가 빙그르 지축을 중심으로 기우는듯했다. 우리는 현기증에 시달리는 듯이 그대로 그 순간을 지속시켰다. 뒤에 따르는 중국인이 또 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시간이 실히 되었을 시간이 우리에게 지옥을 실감케 해주고 지나갔다. 이윽고 ‘크락숀’ 소리가 나더니 자동차 소리가 사라져 갔다. 이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일어났다.”(앞의 책, 45쪽)
장준하 일행은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면서 광야를 한 걸음씩 걸어나갔다. 살갗을 태울 듯이 퍼붓던 햇볕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을 때 장준하의 뒤를 따라 걷던 홍석훈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세 사람은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세차게 흔들기도 했으나 그는 좀체로 깨어나지 않았다. 한참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도저히 걷지 못하겠다면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세 사람은 교대로 그를 부축하고 앞으로 나가다가 웅덩이를 발견했다. 그들은 미친듯이 물을 마시고 나서 홍석훈에게도 먹였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참외밭을 만나서 주린 배를 채운 일행은 졸음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옥수수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잠을 깬 장준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들었다. 쉬저우에서 동북방향으로 가는 기차는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네 사람은 아직도 일본군 관할지역 안에 있음이 분명했다. 일본군은 중국 대륙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철도 연변과 주요 도시들에만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날이 밝자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어느 마을 근처에서 한 무리의 농부들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행이 긴장한 표정으로 접근하자 그들은 기꺼이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차를 넉넉히 마시고 물통까지 채운 일행은 서투른 중국말로, 그리고 땅바닥에 쓴 한자로 거기가 어디인지를 물었다. 농부들은 쉬저우까지 시오리밖에 안 되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네 사람은 죽을 힘을 다해 사흘 동안 걸어온 데가 쓰카다부대에서 6km쯤 떨어진 곳이라는 말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농부들은 앞에 보이는 산까지 삼십리라면서, 그 너머에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장준하 일행이 그 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뒤쪽에서 손을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일행이 불길한 예감 때문에 앞으로 치닫자 그들은 등 뒤에서 총을 쏘아댔다. 무작정 달리던 일행 앞에 강이 나타난 것을 본 그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노를 저어 강을 타고 흘러가던 사공이 배를 태워주었기에 그들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에 타고 보니 김영록이 없었다. 동지를 잃은 슬픔을 억누르면서 배를 내려 삼십리 길을 달아난 세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장준하가 눈부신 햇빛에 눈을 떠보니 구식 모젤권총을 든 사내를 따라 몇 사람이 20여m 앞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은 그들과 땅바닥에 한자를 쓰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장준하가 “우리는 한국 청년, 그제 밤 일군 병영 탈출, 지금 팔로군을 찾아간다”라고 쓰자 그들은 ‘우리가 바로 팔로군’이라고 대답했다. 세 사람은 그들을 따라 본부가 자리잡은 곳으로 갔다. 대장처럼 보이는 풍채 좋은 남자가 중국어로 무엇인가를 묻자 장준하는 그의 책상에 놓인 붓을 들어 종이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 청년이오.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하려는 청년들이오. 우선 중국군에 편입해도 좋소.” 그는 붓글씨로 “우리는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요. 우리의 영수는 장개석 총통이오”라고 적었다.
우리 셋은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얼싸안고 울고 싶었으나, 어느새 눈매가 아프고 가슴에 뭉쳤던 한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울음에 가까운 흐느낌이 솟구쳐서 우리는 웃음도 웃을 수 없어, 그 벅찬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채 발을 굴렀다. 이제 모든 의혹은 말끔히 벗어지고 우리의 탈출이 성공한 것 을 확인했다.
추격당하던 그때의 절박하던 긴장이 어느새 아름다워졌다. 그들이 팔로군이 라고 자처하면서까지 우리를 데려온 것까지도 고마웠다.(앞의 책, 69 쪽) (계속)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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