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박근혜의 방문정치, 제대로 하려면 동아투위도 가라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29일자 기사 '박근혜의 방문정치, 제대로 하려면 동아투위도 가라'를 퍼왔습니다.
[김종철 칼럼] 동아투위 113명, 벌써 18명이 떠났고 평균 연령 70대 중반

새누리당 대통령후보 박근혜의 ‘방문 정치’가 순항을 거듭하다가 지난 28일 암초에 부닥쳤다. 그가 그날 오전 10시반쯤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골목 안에 있는 전태일재단 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태일의 유족과 쌍용차 해고노동자, 시민단체 회원 등 50여 명이 ‘방문 반대 성명’을 발표하면서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발길을 돌려 청계천 6가에 있는 ‘전태일 다리’로 가서 분신 장소를 둘러보며 그의 동상 앞에 꽃다발을 바치려고 했다. 그것을 말리려던 쌍용자동차 노조 간부는 새누리당 관계자한테 멱살을 끌려 밀려나갔다.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한 뉴스통신사의 사진은 ‘올해의 보도사진 대상’을 받을 만하다. 사진을 보면 전태일 열사 동상의 턱 바로 밑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박근혜를 향해 거친 몸짓으로 무언가 항의를 하고 있다. 벤치에 앉은 박근혜는 꽃다발을 안은 채 가벼운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 전태일 동상의 눈길은 공교롭게도 박근혜를 향하고 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희대의 코미디’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전태일이 어떤 사람인가? 지금부터 42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 박근혜가 꽃다발을 들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름으로써 한국 노동운동사에 영원한 열사로 우뚝 서 있는 인물 아닌가? 당시 대통령은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였다. 박근혜가 요즈음 ‘산업화와 민주화는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으로 ‘구국의 혁명’을 일으켰다고 추앙하는 바로 그 사람 말이다.


박근혜는 지난 20일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확정되고 나서 바로 이튿날부터 ‘방문 정치’를 시작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묘소를 참배하고 김해 봉하마을에 가서 노무현의 묘소에 헌화하고 절을 한 뒤, 김대중의 부인을 찾아가서 덕담을 나누던 날 김영삼까지 만났던 것이다. ‘진정성이 없는 정치적 쇼’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 이벤트쯤이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면서 너그럽게 보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전태일 유족 방문 기도와 동상 앞 헌화는 ‘노동운동의 열사’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그의 동지들에 대한 결례였다. 전태일의 죽음을 부른 것은 박정희 정권의 비인간적 노동정책과 열악한 작업환경이었음을 솔직히 시인한 뒤에 ‘아버지의 과오를 대신 사죄하는 마음’으로 고인 앞에 꽃을 바치겠다고 했으면 누가 그를 막아섰겠는가?

박근혜가 가장 먼저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은 1975년 4월 갑자기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 관련 8명의 유족이다. 최근 ‘민청학련·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건네받은 사형집행명령서 등을 검토한 결과 사형당한 인혁당 사람들이 대법원 사형 판결 전에 이미 사형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런 초법적 지시를 내릴 사람은 당시에 단 한 명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 대목에 쓴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아닌 문제가 있다. 1975년 3월 17일 신새벽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동원한 폭력배들에 떠밀려 거리로 쫓겨난 이래 지금까지 37년이 넘도록 원상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언론인 113명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뒤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과 독재에 맞서, 긴급조치에 재갈이 물린 언론자유를 살리려고 싸우다가 강제 해직당했다는 사실은 박근혜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무렵에 청와대의 퍼스트레이디였기 때문이다. 

1975년 3월 18일 오전 그들이 결성한 모임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였다. 동아투위 위원 113명 가운데 18명은 세상을 떠났다. ‘거리의 언론인’으로서 긴급조치 9호 시대에 제도언론이 묵살하던 ‘민주·인권 사건’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10명이 투옥되었고, 위원 거의 모두가 취업 방해, 해외여행 금지 등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작고한 18명의 사망원인은 감옥에서 얻은 난치병, 정보기관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 생활고에 따른 정신적 압박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자유언론의 부활’을 열망하고 있는 동아투위 위원 95명 가운데 세 사람은 8순을 넘겼고 다수가 70대 초·중반이다. 

정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8년 11월 “유신정권은 동아일보사의 광고주들을 중앙정보부 남산분실로 불러 광고계약을 취소케 하고,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및 보안각서를 쓰게 하여 광고 수주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사를 탄압하였고, 중앙정보부와 문화공보부 등은 자유언론 실천을 주장하는 기자들을 해임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사 경영진에 압력을 가해 113명을 해임하도록 한 당사자임을 명백히 드러낸 최초의 공식 결정이었다.

박근혜는 이제라도 동아투위를 찾아가서 박 정권이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강제 해임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한 사실을 인정하고 언론자유는 어떤 체제 속에서도 탄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고 나서 1980년 2월에 작고한 동아투위 위원장 안종필을 포함한 18명의 묘소에 참회하는 뜻으로 조화를 바친다면 누가 그것을 거부하겠는가? 

김종철·연합뉴스 전 사장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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