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8일 화요일

갑작스런 결혼과 일본군 ‘자원입대’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28일자 기사 '갑작스런 결혼과 일본군 ‘자원입대’'를 퍼왔습니다.
(새 연재) 장준하는 누구인가 (2)

▲ 장준하.

장준하가 일본신학교 예과에 다니던 시절 도쿄에는 목사 박영출이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던 ‘숭덕학사(崇德學舍)’가 있었다. 그곳은 ‘배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목회를 여는 장소’로 유명했다. 숭덕학사에 열심히 나가던 장준하는 거기서 평생 동지가 되는 게이오대 학생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을 만났다. 장준하는 숭덕학사의 교회위원이 되어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동포 어린이들에게 찬송가와 동요를 가르치면서 조국의 역사에 눈을 뜨게 하려고 애썼다.
장준하의 신학생 생활은 한해 반 만에 끝났다. 1943년 들어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거센 공격에 밀리자 일제가 10월 20일 조선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학도지원병제’를 공포한 뒤 11월 8일부터 문과계 대학, 전문학교, 고등학교 재학생 가운데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징용영장을 발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로만 지원제일뿐 실제로는 강제징집제도였다. 장준하는 그해 11월 하순 짐을 꾸려 도쿄를 떠나 귀국했다. 그가 겨울방학이 되기도 전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요시찰인’이 되어 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아버지와 가족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주의 집으로 돌아간 장준하는 달포만인 1944년 1월 5일 김희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세례명이 ‘로자’인 김희숙은 장준하가 신안소학교에서 담임으로 가르치던 제자였다.
“김희숙의 어머니 노선삼(비리스다) 여사는 경건한 천주교 신자로서 주위의 존경을 받는 부인이었다. 부군 김준덕은 반일 사상가로서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그 바람에 가세가 어려워져 하숙을 치면서 가계를 꾸려 나갔고 장준하와 김용묵이 신안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동안 그 집에서 하숙을 하였던 것이다. (·····) 동경에 온 장준하는 3년간의 하숙생활에서 정이 든 고국 정주의 노선삼 여사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 편지 겉봉에 쓰인 발신자 장준하의 주소를 보고 로자가 은사인 장준하에게 어머니를 대신하여 답장을 썼고 그로부터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편지가 오가게 된 것이다.”([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83쪽)
도쿄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친한 벗들에게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겠다’고 실토한 장준하의 갑작스런 결혼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장준하와 김용묵이 떠난 뒤 김희숙의 어머니는 다른 하숙객을 구할 수가 없어서 집안 형편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보성여학교에 다니던 김희숙은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일제는 조선의 처녀들을 징발해서 이른바 ‘정신대(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공장이나 전선으로 보내고 있었다. 반일 망명인사의 딸인 김희숙이 위안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받은 장준하는 “나는 귀국하는 대로 로자를 먼저 안정시켜놓고 일본군에 가겠다”고 김용묵에게 말했다고 한다. 일제가 유부녀는 위안부로 징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김희숙과 결혼한 지 2주 뒤인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입대했다. 그때 신부의 나이는 16세였다.
장준하는 1971년에 초판을 낸  자신의 저서 (돌베개)(화다출판사)에 입대하던 날의 기억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이하부터의 인용문은 2012년에 출판사 세계사가 6쇄를 찍어낸 (돌베개)를 참조했음)
일본말 성경과 독일어 사전, 희랍어 성경과 사전, 이렇게 네 권을 든 학생모와 학생복 차림의 내가, 정주역에 닿았을 땐 아무도 내게 눈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
나에게는 만장도, ‘다스키’라는 멜빵도 그 ‘무운장구(武運長久)’의 띠도, 히노마루[일장기]의 머리끈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전쟁 중의 물자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시골에서 입영을 위해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들이 지방관청과 유지들로부터 마련되어 보내왔건만, 나는 그것을 몸에 한 번 대어보지도 않은 채, 몽땅 우리 집 아궁이 속에 넣어버렸다. (···) 정주역에서 평양행 발차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의 시간이 있었기에 역 대합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식들의 입영 때문에 우울 한 그 지방의 유지들, 흐르는 눈물을 닦기에 정신 없는 아낙네들, 거의 술에 만취되어 이성을 잃은 듯한 학도지원병들, 이 틈을 놓칠세라 친일파다운 격려와 축하인사를 뿌리고 돌아다니는 가증스러운 얼굴들,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홀로 고독을 즐기고 있던 내 귓전을 스치던 발차시간을 알리던 확성기 소리, 그리고 경의선 열차의 요란한 기적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주마등같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돌베개], 17~18쪽)
평양 제42부대에 배치된 장준하는 ‘맨손으로 말똥을 치우고 말발굽을 닦 아내는 일을 강요당했다. 그곳에는 2백여명의 학도병들이 끌려와 있었다.
그때의 울분은 지필로 기록할 수가 없지만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 분과도 같이 처절한 것이었다. 몹시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적 작 업을 계속하여온 우리들은 대부분 손발에 동상이 걸려 고생을 하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
밤이면 밤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부어오른 엄지손가락을 통해서 등골까 지 쑤시게 만들었다. 불침번을 서는 초년병 동료들이 나의 고통을 안타까워 해 주던 그 정성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마다 나는 내 가슴속에 지닌 성경책을 꺼내어 몇 장씩을 읽어가며 아픔을 참아보았다.([돌베개], 10쪽)
많은 학도병들이 오후에 받는 교련을 피하려고 가족이 날마다 면회를 오게 하는가 하면, 어떤 부모들은 아들이 일선이 아니라 평양 근처의 부대에 남게하려고 일본군 고급장교들을 요정으로 초대해서 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준하한테는 어머니와 아내가 한 번, 아버지가 한 번 면회를 왔을 뿐이었다.
동상이 악화된 엄지손가락 때문에 ‘뼛속을 후벼내는듯한 아픔’을 나흘 동안이나 참고 견디던 장준하는 닷새 째 되던 날 의무실을 찾아갔다. 의무관인 일본군 중위는 ‘마취제가 없으니 생으로 상처를 째야 한다’면서 엄지손가락에 알콜을 한두 번 문지르더니 그대로 메스를 갔다 댔다. 장준하는 의무관이 다섯 군데를 째는 동안 결연하게 고통을 참아냈다. ‘수술’을 마친 일본군 중위는 “야, 내 외과의사 생활 십여년에 너 같이 지독한 놈은 처음 본다. 장하긴 장하다. 독종이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장준하가 입영한 지 만 4주가 되던 날, 학도병 200여명 가운데 160여명이 중국 북부지방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병영 안에 퍼졌다. 거의 모든 학도병들이 평양이나 조선반도 안에 남으려고 갖은 공작을 하고 있었지만 장준하는 동상에 걸린 엄지손가락 때문에 중국의 전선으로 가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내일 중지 파견 선발에만 끼면 나는 조국의 아들이 될 수 있으련만. 그 당시의 나의 절망 속에 일루의 희망은 내가 중경(중국 사천성에 있는 당시 중국의 수도)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든 중국만 가면 일군을 탈출할 수 있고 탈출만 하면 임정에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만 믿어졌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중국군에라도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앞의 책, 14쪽)
이튿날 아침 각개점호 시간에 소좌인 일본인 부대장이 학도병들을 점검하다가 손에 붕대를 감은 장준하를 보고 “그 팔은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었다. 그는 생손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부대장이 ‘아픈 몸으로까지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말하자 장준하는 “아닙니다. 이번에 꼭 동료들과 함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하게 호소했다. 소좌는 “됐어, 그 원기가 장해!”라고 칭찬했다. 그렇게 해서 장준하는 평양 제42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며칠 전에 면회를 온 아내 김희숙에게 장차 자신의 계획을 은밀히 알려준 바 있었다. “중국에 가면 매주 주말마다 편지를 하마. 만약 그 편지의 끝이 성경 구절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지막 받는 편지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그 성경 구절을 읽고 있을 땐 이미 나는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진영이나 우리 ‘임정’의 어느 곳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장준하를 포함한 학도병 160여명을 태운 열차는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를 지나 사흘 만에 중국 강소성의 서주에 도착했다. 그날이 2월 16일이었다. 그들은 30분쯤 행군해서 지금의 보충대 비슷한 대대 규모의 부대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일본군을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장준하는 ‘일본제국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행한 탈출이 아니라 부대의 지휘급 일인들의 불찰과 오만에 원인이 있는 탈출로 꾸미자’는 생각을 굳혔다.
어느 날 그런 계획에 딱 들어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준하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밥통을 취사장에 반납하고 있는데 일본인 상등병이 ‘이 더러온 반도놈아’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이미 깨끗하게 씻은 밥통을 다시 씻어오라고 시비를 걸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갈아앉히면서 불침번을 서고 난 장준하는 ‘얼마쯤 인정을 가진 하사관’인 내무반장 우에다를 찾아가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지금 불침번 교대를 마치고 들어오다가 발길을 돌려 탈출을 하려다 다시 마음을 돌려먹고 돌아왔습니다.” 일본인 상등병에게 당한 모욕을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내무반장은 숨을 거칠게 물아쉬면서 장준하를 쳐다보았다.
장준하는 내무반장과 고참병들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대하면서 지도해주어서 "내가 조선사람인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친형님들 틈새에 끼어 있는 것처럼 병영생활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그는 탈출할 생각을 하다가 "반장님에게 인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 같아 포기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내무반장의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이튿날 아침 시간에 문제의 상등병에게 “너 같은 놈 때문에 황은(皇恩)에 감동하여 고등교육을 받고도 그 몸을 홍모(鴻毛)처럼 여겨 용약 군에 지원하여 온 많은 학도병들을 탈출시킨 것이야”라고 꾸짖으서 그를 사흘 동안 영창에 가두었다. 그날 밤 내무반장은 장준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걷자고 하면서 "아리가토오(고맙다)"를 연발했다. (계속)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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