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03일자 기사 '사상 최대의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과 권력 (54)'를 퍼왔습니다.

▲ ⓒ 5·18 기념재단
1980년의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는 7월부터 언론인 ‘숙청’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문공부는 ‘비위 언론인 사별 현황’과 ‘사이비 언론인 정화방안’을 작성하는 한편 ‘대외비’로 ‘사이비 언론 기자 정화대책’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 언론 죽이기의 표면상 형식은 ‘자율’이었다. ‘국민의 건전한 국가관 확 립으로 사회 안정에 기여하기 위해 언론계 스스로 자율 정화’한다는 이 계 획은 1)반체제 문제언론인 제거 2)언론계 부조리·부정 척결 3)국익 우선의 언론풍토 조성 등이 주요 목표였다.
‘국익 우선’의 언론이란 캐치프레이즈는 신군부 실세들이 만들어낸 용어로 언론인 정화와 언론사 통폐합을 추진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핵심 개념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부류의 기자들을 문제언론인이자 권력 장악의 장애물 로 보았는가. ‘언론계 자체 정화계획’에서 신군부가 설정한 정화 대상자는 1)반체제·용공·불순한 자 또는 이들과 직·간접 동조한 자 2)편집·제작 및 검열 거부 주동 및 동조자 3)부조리·부정·부패한 자 4)특정 정치·경제인과 유착되어 국민을 오도한 자 5)기타 사회의 지탄을 받은 자 등이었다.(정연 수, ‘자료로 추적해 본 언론인 대학살의 실상’, , 164쪽)
신군부의 ‘언론 정화 작업’은 보안사 준위 이상재를 중심으로 한 ‘언론대책반(이하 대책반)’이 주도했다. 대책반은 7월 초순 ‘자체 정화 계획서’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숙정’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라고 언론사에 파견된 정보요원들에게 지시했다. 대책반은 다른 정보부처와 긴밀히 협의해서 중앙과 지방 언론인 700여 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당시 강기덕 보좌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던 이상재는 전 언론인의 목 줄을 쥐고 있던 염라대왕이었다. 그래서일까. 내로라 하는 중앙 일간지의 편집국장과 부국장, 부장 등 간부들이 남의 눈에 띌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서 서울시청에 있는 이상재의 방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언론사의 고위 간부 들이 업무 협조를 빙자해 경쟁적으로 육군 준위를 찾는 상황에서 이미 언 론과 언론인의 자존심 같은 것은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윤덕한, ‘전두환 정권하의 언론’, , 505쪽)
신군부는 7월 말 자체적으로 ‘정화 결의’를 하라고 언론단체들에 강요했다. 신문협회, 방송협회, 통신협회는 7월 29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쳐 ‘언론 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 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문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국가보위, 사회정화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언론계 자체가 안고 있 는 저해요인을 과감히 자율적으로 척결하여 언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 체의 부조리와 비위를 근절하여 새로운 언론풍토를 조성한다.
그 결의문이 나오자마자 신군부는 7월 31일 ‘사회불안 조성’, ‘계급의식 조장’ ‘음란 저속’ 등의 이유로 정기간행물 172 종(주간 15 종, 월간 104 종, 격월간 13 종, 계간 16 종, 연간 24 종)을 폐간했다. 기자협회보, 계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월간 뿌리 깊은 나무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언론인 강제해직은 1980년 8월 2일 중앙매스컴(중앙일보, 동양방송, 월간중앙 등)에서 시작되었다. 중앙일보사가 ‘자율’이라는 구실로 언론인 32 명을 무더기로 해고한 것이다. 그 회사의 기자들은 그해 5월 기협과 함께 전국의 기자들이 밀어붙인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에 앞장선 바 있었다.
8월 4일 합동통신사, 9일 동아일보사, 10일 한국일보사의 차례로 16일까지 전국 39개 언론사에서 900여 명이 해직당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 1980.7.31~8.6까지 해직된 언론인에 대한 보고. 933명을 정화했다고 기재됐다. <문공부, 언론인 정화 결과>
8월 16일 문화공보부가 작성한 공식 문건인 ‘언론인 정화 결과’에 따르면 그때 해직된 언론인은 모두 933 명이었다. 그 가운데 298 명은 신군부가 직접 선정했고, 나머지 635 명은 각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선별’했다고 한다. 언론사 경영진이 평소에 밉게 보던 사원들을 숙정 대상에 끼워 넣었음이 정부 문서로 확인된 셈이다.
해직된 언론인의 수를 보면 KBS가 86 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MBC 46 명, 신아일보사 36 명, 경향신문사 34 명, 현대경제신문사 33 명, 동아일보사와 한국일보사가 각각 25 명이었다. 해직된 933 명 가운데는 검열 거부를 주도했던 한국기자협회 집행부 전원과 기협 분회 간부들, 검열·제작 거부 운동에 앞장섰던 기자들이 대부분 들어 있었다.
신군부는 언론인들을 강제해직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화대상자’를 A·B·C 급으로 나누어 생존권을 제한하는 초법적 징벌권을 행사했다. ‘정화언론인 취업 허용 건의’라는 문건에는 A급은 ‘국시 부정 행위자’, B급은 ‘제작거부 주동 및 선동자, 거액 부조리 행위자, 범법 행위자’, C급은 ‘단순 제작거부 동조자 , 부조리 행위자’라고 정해져 있었다. 총무처가 만든 ‘비위 관련 공직자 취업 제한 규정’이 해직언론인들에게도 적용되어, ‘A급은 영구히, B급은 1년 간, C급은 6개월 간 취업 금지’를 당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매일 수십 명의 기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편집국 한 귀퉁이에서는 간부들 사이에 신군부에 줄 대 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부장은 짐 보따리를 싸들고 작별인사를 하는 부원에게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의자에 앉은 채 ‘그래 가봐’라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부하기자의 해직 따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 다.
오직 이 혼란기를 이용해 어떻게 해서라도 전두환 군부에 줄을 대 국회 의원 공천이라도 받아보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귀동 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로 당시 편집국은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동 료애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결국 민정당 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선거가 치러지던 날 그는 투표소 에서 마주친, 몇 달 전 일어서지도 않고 떠나보냈던 그 후배 기자에게 반색 을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 후배가 한 장의 표로 보였던 것이다.(앞의 책, 508쪽)
언론인 대학살이 자행된 뒤 전국의 모든 언론사들에서 신군부를 비판하는 움직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살아남은 기자들’에게는 위로금조로 특별보너스가 지급되기도 했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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