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시사IN 2012-08-20일자 기사 '"긴급조치 1, 2호는 장준하 개인 겨냥한 것"'을 퍼왓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논란이 재점화된 가운데 고상만 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관이 (시사IN) 제 258호에 주목할 만한 증언들을 소개했다. 고씨는 참여정부 시절 의문사위 담당 조사팀장으로서 고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들을 조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의문사위 조사에 응한 중앙정보부 관계자는 긴급조치 1호 및 2호가 사실은 “장준하 한 사람을 잡아넣기 위한 조치”였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반유신·반박정희 시위가 격화되자 1974년 1월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 및 2호를 발포한 바 있다. 장준하 선생은 이 조치에 의한 첫 구속자가 됐다. 그런데 이것이 특정 개인을 잡아넣기 위한 조치였음이 중정 관계자의 증언으로 드러난 것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사상계> 대표 시절의 장준하 선생.
고상만씨는 나아가 일각의 추측대로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면 ‘왜 죽인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유력 증언도 소개했다. 첫 번째는 법정스님의 증언이다. 법정스님은 의문사위와 만난 자리에서 1974년 12월말 장준하 선생을 만난 기억을 되살렸다. 당시 장준하 선생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병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 종로에 있는 조광현내과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을 방문한 법정스님이 어서 몸을 추스르시라며 덕담을 건네자 장준하 선생이 부탁이 있다며 베개 밑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스님에게 건네줬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그 뭉치가 바로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제2차 100만인 서명운동’이었다고 증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2003년 12월 의문사위와의 면담에서 법정스님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었다. 1975년 7월29일 동교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을 장준하 선생이 찾아와 만났는데 당시 그가 “내가 이제 희생을 각오하고 싸우겠다. 그리고 당신한테 얘긴데, 사실은 나도 지금까지 어떤 대망을 가지고 당신에 대해서 라이벌 의식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포기했다.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 당신이 움직일 수 없으니까 나라도 움직여서 내가 하겠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일을 해내자”라면서 실무적인 일을 자신이 맡아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은 유신헌법을 개헌하자는 제1차 100만인 서명운동을 조직하다가 긴급조치 1호 및 2호 위반으로 투옥된 바 있다. 그런데 가까스로 풀려난 그가 굴하지 않고 또 다시 2차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공식 선언한다면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고상만씨는 주장한다. 장준하 죽음의 미스테리는 여기서부터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가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이다. 장준하 선생 사망 당일, 중앙정보부와 기무사(당시 보안사)가 어떻게 움직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떤 보고 문건을 올렸는지도 의문투성이다. 참여정부 당시 국정원과 기무사는 의문사위의 자료 제출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고 고상만씨는 비판한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준하기념사업회가 8월16일 공개한 장준하의 유골 사진(위). 1975년 8월17일 등산 중 추락사한 장준하의 시신을 검시하는 모습(왼쪽).
의문사위의 조사 및 자세한 증언 내용과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에 대해서는 현재 시중에 판매 중인 (시사IN)258호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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