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5일 금요일

아테네 대학생 “부자들 탈세와 정치인 부패가 위기의 원인”


이글은 경향신문 2012-06-14일자 기사 '아테네 대학생 “부자들 탈세와 정치인 부패가 위기의 원인”'을 퍼왔습니다.

ㆍ오창민 기자, 그리스 상점가를 둘러보니

13일 오전 아테네 공항에 들러 다음 출장지인 이탈리아 로마행 비행기 표를 예매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리스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액세서리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주인으로 보이는 30대 여성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낮잠 자는 ‘시에스타(Siesta)’ 시간이어서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에스타는 이탈리아·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국가와 라틴아메리카의 낮잠 풍습을 말한다. 한낮에는 무더위 때문에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하여 저녁까지 일을 하자는 취지이다. 

시에스타 시간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후 1시~3시30분, 그리스에서는 오후 2~4시까지 이어진다. 시에스타 중에는 상점들은 물론 관공서도 문을 닫고 낮잠을 즐긴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니 오후 2시5분이었다. 주인은 “오후 5시30분 이후나 내일 오전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액세서리 가게에서 쫓겨나듯 나와 보니 바로 옆 문방구는 이미 셔터가 내려졌다. 내친김에 거리의 상가 20여곳을 둘러봤다. 사진관 2곳과 컴퓨터 가게, 자동차 렌털 회사, 화장품 가게, 화원, 가전제품 대리점, 아동복, 잉크 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다. 대부분 영업시간이 오후 2시까지라고 적혀 있었지만 일부는 그런 안내조차 없었다. 애완동물 가게와 핫도그 가게, 안경점, 복권판매점, 세탁소 등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가게도 오후 3시가 되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주인이 안에서 문을 잠갔고, 세탁소만 남았다. 세탁소가 왜 문을 닫지 않았는지 궁금증이 일었는데 금방 풀렸다. 5분쯤 뒤 뚱뚱한 여자가 허겁지겁 찾아와 비닐에 포장된 세탁물을 찾아갔고, 이내 세탁소 문도 닫혔다.

낮잠 자는 상점가 13일 오후 그리스 아테네의 파파고우 알렉산드리아 거리는 상가가 줄지어 들어서 있었지만 시에스타 시간대여서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낮잠시간 상가 모두 철시, 손님 와도 “내일 오세요”식당·가게 신용카드 사절… 탈세 손쉽게 현금 거래만

불현듯 ‘어린시절 외할아버지께서 아침 일찍 논에 나가 일하신 뒤 점심 드시고는 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곤하게 한숨 주무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땡볕에서 일하는 농민이나 육체 노동자가 아니지 않은가. 손님이 물건을 사러 왔는데 낮잠이라니…. 황당해하는 기자에게 거리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은 “무더운 낮 동안 휴식을 취함으로써 시에스타는 일의 능률을 높여준다. 우등생일수록 낮잠도 잘 잔다. 낮에 잠을 자지 않으면 밤에 집중력이 떨어져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에 아테네의 관광명소인 아크로폴리스를 찾았다. ‘불황에 정치 불안까지 겹쳐 그리스를 찾는 관광객이 급감했다’는 언론 보도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인지라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7유로짜리 메뉴와 2유로짜리 주스를 주문한 뒤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식당 주인은 “신용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운터에는 신용카드용 단말기가 놓여 있고, 비자카드와 아메리칸익스프레스카드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주인에게 단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왜 안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신용카드를 몇 차례 단말기에 대고 긁더니 “전화 연결이 잘 안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어 지갑에서 10유로 지폐를 꺼냈다. 주인은 1유로 동전을 내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내가 “회사에 제출하기 위해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주인은 딴전을 피웠다. 결국 영수증을 받지 못했다. 

13일 오후 아테네 파파고우 알렉산드리아 거리의 한 상가에 시에스타 시간을 알리는 표지와 함께 셔터가 내려져 있다.

아테네 시내에 있는 기념품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50% 할인해서 10유로에 파는 플라톤 조각상을 집은 뒤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이 가게 주인도 신용카드를 단말기에 넣고 몇차례 긁더니 “잘 안되는데 혹시 다른 신용카드가 없느냐”고 물었다. 앞서 경험한 식당 주인과 비슷한 수법이었다. 10유로 지폐를 주고 영수증을 요구했다.

주인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었다. 그런데 ‘리시트(receipt)’라는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식당에서 나오면서 아테네대학에 다닌다는 한 여학생을 만났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유로위기 취재를 위해 왔다”고 말하자 그는 “부자들의 탈세와 정치인의 부정부패가 위기를 부른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국민 모두가 부정부패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지난해 가을 (그리스) 정부가 외국에서 무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막대한 리베이트(뒷돈)를 챙기기도 했다. 부패 해결 없이는 위기의 해결도 어렵다는 데 다들 공감하고 있지만 몸에 밴 탈세 등의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에스타’와 ‘부패’. 이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재정난을 겪고 있는 남부 유럽 국가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스타 문화는 스페인이 원조이다. 시에스타 자체가 스페인 말이다.

아테네 | 글·사진 오창민 기자 riski@kyunghyang.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