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프레시안 2013-02-19일자 기사 '박근혜 당선인, 이 남자의 시신 계속 외면할 건가'를 퍼왔습니다.
[기고] 동료의 죽음, 그리고 어느새 58일
2003년 태풍 '매미'가 한반도 내륙을 강타할 때 35미터 크레인 위의 한 젊은 사내는 엄청난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다. 태풍 매미의 위력이 수백 톤의 크레인을 하룻밤 사이 일곱 번이나 빙글빙글 돌렸지만 그는 견뎌내었다. 그는 손배·가압류와 노조 탄압, 정리해고에 맞서 크레인 농성 중 129일 만에 스스로 산화한 고(故) 김주익 열사다.
10년이 흘러 똑같은 내용으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최강서 열사는 글을 쓰는 이 시각 한진중공업 공장 내 '단결의 광장' 차가운 바닥에 18일째 누워 있다.
2011년 2월 14일, 한진중공업은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 수백여 명에게 해고를통보했다. 해고 통보 다음 날 회사는 174억 원 규모의 주식을 주주들에게 배당했다. 이 중 현금 배당 금액이 52억 원 정도이며 이 가운데 다시 절반이 조남호 회장 개인에게 배당되었다. (당시 한진 측은, 현금 배당 52억 원은 그 전해에 흑자를 낸 4개 계열사의 배당 액수이며 한진중공업의 배당 액수는 1원도 없다고 해명했다. ) 경영진과 임원들의 연봉은 올랐다. 경영이 어렵다며 앞에서는 노동자를 해고시키고, 뒤에서는 총수와 경영진들이 돈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이런 회사를 짧게는 수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을 다녔던 사람들이 어떻게 손 놓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한진중공업은 3년 동안 영도조선소에 수주 한 건 하지 않고 오직 필리핀 수빅 조선소로 수주 물량을 돌렸고, 영도조선소를 축소 내지 폐쇄하는 수순을 밟는 단계로 정리해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한파를 뚫고 2011년 1월 6일 35미터 크레인 위로 올랐고,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309일간 농성을 펼쳤다. 최강서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매일 안부 문자를 보냈고, 해고된 자신들을 위해 악조건 속에서 함께 싸워주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항상 고마워했었다. 6월 27일 행정 대집행 이후 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크레인을 향해 100번의 절을 올리는 사람들에게서 흘러내린 땀을 닦아주던 마음씨 착한 젊은 노동자였다.
국회의 권고안으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농성을 접고 내려왔을 때도 누구보다 그 기쁨이 컸을 최강서였다. 다시 복직하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회사 앞 천막 농성장을 거의 매일 방문하였고 도와줄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강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리해고 싸움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을 함께했기에, 강서는 생계가 어려워도 동료와 같이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1년의 기다림 끝에 복직을 한다며 좋아했다. 그때의 미소와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그러나 휴일이 지나면 회사에서 다시 일할 수 있다는 부푼 설렘은 단 3시간 만에 끝나버렸다. 기약도 할 수 없는 강제 휴업 발령이 난 것이다. 푸른 작업복과 안전화 하나 받아보지도 못하고 강서는 돌아서야 했다. 두 번의 배신은 강서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가 됐으리라.
영도조선소 정상화 촉구, 158억 손배소 철회, 6개월 순환 휴직 약속 이행 촉구, 금속노조 조합원 장기 휴업 철회, 민주노조 탄압 중단의 5대 요구를 가지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 노동조합 간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강서였다.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였던 최강서 씨는 지난해 12월 21일 '158억 손배 철회, 민주노조 사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최강서의 죽음, 그리고 어느새 58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농성할 당시, 노조 핵심 간부들이 주축이 된 복수노조세력이 회사의 후광을 업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노무 담당 임원이 복수노조 설립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알려지기도 했다. 최강서는 특히 복수노조 설립 과정의 핵심 인물들에 대해 대단한 배신감과 분노를 표현했었다. 강서는 해고되기 전 노동조합 간부 생활을 하면서 합당하지 못한 사안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서글서글한 성격이었지만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민주노조를 배신하고 회사에 빌붙어 노동자의 영혼을 팔아버렸다며, 회사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증오했었다.
최강서의 죽음 이후 별다른 대응이 없었던 복수노조는 갑자기 회사를 대변하는 수준의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고인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조인 한진중공업지회와 함께 최강서의 죽음에 대한 교섭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해 보자고 제안했다. 일고할 가치가 없었다. 손배·가압류와 정리해고 철회,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2003년 산화했던 김주익·곽재규 열사의 추모 기간에 그들(복수노조)은 열사들을 모욕하고 민주노조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최강서와 충돌한 적이 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폭력을 당했다며 최강서를 비롯해 민주노조 간부들을 경찰에 고소했던 그들인데 무슨 낯짝으로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최강서의 죽음 이후 시신이 장례식장에 있던 41일 동안 회사와 복수노조는 단 한 차례의 조문도 하지 않았고 유가족의 동태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최강서의 죽음은 "생활고에 의한 죽음"이라며 최강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광고를 신문에 싣는 작태를 보였다. 이에 유가족은 굉장히 격분하였고, 그 후로도 회사의 성의 있는 태도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유가족은 회사 앞에 차려진 최강서의 분향소로 주검을 이동하기로 결단했다. 그러나 합법적인 집회 과정에서 경찰은 운구에 최루액을 뿌리고 유가족임을 알고도 고인의 아버님을 폭행했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우연히 회사 안으로 들어왔건만, 회사는 우리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절단기로 출입문을 잘랐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시신을 볼모로 하는 투쟁'이라는 몰상식한 문구를 쓰면서 유가족들 가슴에 다시 한 번 상처를 주었다. 여기에 복수노조 역시 보도 자료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몫을 하였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회사 측에 수차례 협상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회사는 최강서의 주검을 탈취하기 위해 회사 내 전장 공장에 용역경비 30여 명을 숨겼다가 들통 나 망신을 당해야 했다.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회사인데 어떻게 믿을 것인가? 애초에 최강서의 주검을 회사 밖으로 옮기면 협상하겠다고 언론에 브리핑까지 하던 회사는 돌연 입장을 바꿔 회사 관리 범위에서 벗어나는 지역으로 주검을 옮기면 협상하겠다고 한다. 다시 처음에 있던 장례식장으로 옮겨가라는 주장이었다.
41일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도 코빼기 한 번 보이지 않던 회사가 최강서의 주검을 다시 옮긴다고 해서 교섭을 하겠는가? 이 제안은 당장의 상황을 만회해보려는 꼼수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해 유가족들조차 거부했었다. 이 와중에 경찰 고위 간부가 회사와 노조 측 협상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며 중재에 나섰지만, 회사 측은 또다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틀어버렸다. 오죽하면 중재에 나섰던 경찰마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화를 냈었다고 한다.
관을 열어 드라이아이스를 채우는 나날들, 언제까지?
최강서 주검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고 5일 정도는 노조 사무실에 비상식량으로 있던 컵라면만으로 끼니를 때웠다. 회사가 식사 반입을 막아서다. 이뿐만 아니라 회사는 최강서 주검의 훼손을 막기 위한 드라이아이스 반입마저 금지했다. 다급했던 유가족과 조합원들은 드라이아이스만이라도 들여오게 해달라고 경찰에 요청하였다. 무게가 30킬로그램 정도 되는 드라이아이스를 정문이 아닌 6미터 높이의 담장을 통해 넘겨받아야 했다.
최강서의 주검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고 며칠이 지난 뒤 국가인권위원회가 긴급구제요건에 관해 조사했고, 국가인권위가 다녀간 후 비로소 최소한의 음식 반입과 함께 드라이아이스의 조건 없는 반입이 이루어졌다. 현재 최강서 주검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이틀에 한 번씩 관 뚜껑을 열어 드라이아이스를 채워 넣고 있으며, 관을 감싸고 있는 압축스티로폼 틀 사이에도 드라이아이스를 채우고 있다. 냉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지만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가니 걱정이 점점 늘어간다. 한 번 채울 때마다 6박스(180킬로그램) 정도 소비된다. 이런 과정들을 지켜보는 최강서의 부인과 누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만으로 최강서 주검의 훼손을 막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본다. 기온이 올라 갈수록 드라이아이스의 교체 주기도 그만큼 빨라진다. 이에 냉동 탑차 반입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 회사와 경찰은 최강서의 주검을 냉동 탑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에 인권위는 "냉동 탑차가 이동할까 봐 두려우면차량 반입 후 바퀴와 핸들, 그리고 키까지 뽑아가라"고 했지만 회사와 경찰에 정중히 거절당했다.
한편 최강서의 죽음 이후 회사는 노동조합 출입을 막고 출근하려는 지회 간부마저 출입을 통제했다. 현장의 조합원들은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죽을 맛이라고들 한다. 생활고로 인해 대부분 복수노조로 넘어간 상태이지만, 잠깐씩 만나 현장 분위기를 물어보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 눈치를 볼 정도이다. 현장은 더욱 감시가 심하다. 20여 명의 한진 지회 조합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서를 올리는 등 노-노 분리를 철저하게 시행하는 듯하다. 약 400명의 현장 직원이 출근하고 있으며 협력업체 직원과 관리직을 포함해 약 800명 이상이 출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복수노조 위원장은 설 명절 전에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금속노조 30여 명은 시신을 놓고 회사를 무단 점거해 1400여 명의 전체 직원들이 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주검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사이 회사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비롯한 다섯 명을 경찰에 고소했고 경찰, 검찰, 법원의 신속한 결정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국가 중요시설 기물 파손 혐의로 검거하겠다고 한다. 체포 영장이 발부된 그들이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밀려가던 중 회사로 통하는 쪽문 하나가 열려 최강서의 주검을 긴급히 옮길 수밖에 없었건만 저들이 이처럼 하는 것은, 과잉 진압을 무마하고 불법 시위로 몰아가며 지도부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2003년 김주익 열사가 죽고 나서 85호 크레인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그 크레인을 지날 때마다 가슴 한쪽에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묻어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 크레인에 다시 올랐을 때 2003년에 대한 트라우마는 극도에 달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희망버스와 함께 달려와 연대해주고 트위터를 통해 소통한 덕분에 김진숙 지도위원은 309일 만에 살아서 내려올 수 있었다.

▲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뒤로 최씨의 주검이 담긴 관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동료들을 위해 다시 상경 투쟁하는 사람들
짧게는 수백 일에서 많게는 수천 일을 길바닥에서, 철탑에서, 굴다리에서 한겨울 차가운 바람과 눈을 맞으며 삼복더위에 땀에 절어가며 그렇게 악질 자본들과 싸우고 있다. 최근 노동 현안과 관련해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 다수의 의견이었다. 국민 대통합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당선된 박근혜 당선인은 이번 기회에 노동 현안을 풀고 가지 못한다면 향후 5년 동안 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금력, 권력, 총과 칼, 방패로 무장한 그들과 벌거벗은 채로 언제 벼랑 끝으로 밀려날까 두려움에 떨며 저항하는 우리들의 현실. 정론직필은 언론의 사명감이다. 이런 언론이 썩는 것은 그 무엇보다 악취가 심하다. 총칼보다 강하다는 펜은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서서 구부러져 버린 지 오래다. 유신 독재에서도 살아남았고 군사정부에서도 살아남았고 IMF 위기를 극복하며 버텨온 우리의 민중들이다. 힘들다고 해도 죽기보다는 살아서 싸워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을 보았으면 한다.
최강서 열사 산화 58일차, 그의 주검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 글은 (참세상)에도 게재됩니다.
/안형백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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