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8일 목요일

박근혜, 주류 보수의 품에 안길 것인가?


이글은 시사IN 2013-02-28일자 기사 '박근혜, 주류 보수의 품에 안길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줄·푸·세’를 외쳤던 박근혜와 복지국가를 말하는 박근혜가 있다. 중도층 공략 노선이 흔들릴수록 반공 보수·시장 보수 동맹이 압박을 강화한다. 박근혜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두 개의 박근혜가 있다. ‘줄·푸·세’를 외쳤던 2007년의 박근혜와, 복지국가를 말하며 증세까지 시사하는 2012년의 박근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내걸었던 2007년의 박근혜와,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2012년의 박근혜. 성장 만능론자 박근혜와 ‘성장에서 고용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들고 나온 박근혜. 2월25일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는, 두 박근혜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를 겨루는 ‘보수의 내전’ 속에 닻을 올린다. 진보는 진보대로, 두 박근혜를 둘러싼 보수 내전에 어떤 식으로 참전할지를 두고 내부 논쟁이 한창이다. 

시계를 대선 전으로 돌려보면 보수 내전의 지형이 좀 더 선명히 보인다. 한국 보수의 양대 축이라 할 만한 ‘반공 보수’와 ‘시장 보수’의 눈에, 2012년 박근혜표 대선 공약은 지나친 좌클릭이었다. 대선 기간에도 ‘반란’ 시도는 몇 차례 있었다. 시장 보수를 대표하는 강성 시장주의자인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박근혜표 좌클릭을 상징하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여러 번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정체불명”이라며 아예 폐기론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는 흔들리지 않았다.

ⓒ뉴시스 대선 기간에도 박근혜 후보의 ‘좌클릭’에 맞선 강경보수의 ‘반란’ 시도가 있었다. 2012년 10월23일 빛고을노인건강타운을 찾은 박근혜 당시 후보(왼쪽).

보수 내전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불타올랐다.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발언과 정수장학회 문제 등 역사관 문제로 얻어맞으며 중도층 공략 노선이 휘청거리던 때였다. 박 후보가 취약해지자, 눌려 있던 반공 보수와 시장 보수가 기회를 잡았다. 박근혜호의 항로 쟁탈전이 벌어졌다. 

반공 보수는 북방한계선(NLL) 카드를 던졌다. 정문헌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록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10월8일이다. 박근혜 캠프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이한구 원내대표는 곧바로 이를 “영토주권 포기 사건”으로 규정하며 이슈를 키웠다. 반공 보수와 시장 보수가 합작해 박근혜호의 항로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역사관 논란으로 취약해진 박근혜 후보는 이때부터 대선 기간 중 가장 우클릭한 캠페인으로 끌려들어간다. NLL 논란은 한 달을 끌었다.

곧이어 시장 보수도 움직였다. 한동안 경제민주화에 협조하겠다고 말하던 전경련은 10월25일 보도 자료를 내고 ‘경제위기론’과 ‘경제민주화 중단론’을 정면으로 던졌다. 박근혜 후보가 가장 취약해진 타이밍에 들어온 공세였다. 박 후보는 11월8일 경제5단체장 간담회에서 재계 의견에 기운 발언으로 화답했다. 시장 보수는 최대 눈엣가시였던 김종인 위원장 축출에도 성공한다. 11월20일 경제신문 공동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김종인 위원장의 역할은 끝난 것인가?”라고 묻자 박 후보가 짧게 답했다. “네.” 박근혜 캠프는 이후 캠페인의 기조를 경제민주화에서 경제위기론으로 틀었다([시사IN] 제273호 기사 참조).

대선이 끝난 후에도 내전은 계속된다. 보수 진영에서는 “대선 공약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노골적인 공약 수정 요구를 내놓으며 ‘2012년의 박근혜’를 사실상 ‘선거용’으로 규정했다. 이한구 원내대표와 심재철 최고위원이 총대를 멨다.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이 비중 있게 받아썼다. 보수의 대표 논객인 조갑제 기자도 나섰다. 박 당선자의 대표 의료복지 공약인 ‘4대 중증질환 전액 보장’ 공약은 정부 출범 전부터 ‘비급여 항목 제외’로 후퇴했고, 보수 언론은 이를 합리적 판단으로 포장했다.  

“위기 땐 기존 보수의 품이 안락해”

반공 보수도 거들었다. 국회가 새해 예산안에서 국방 예산을 정부 제출안 대비 1% 삭감하자, 김관진 국방장관과 노대래 방위사업청장, 청와대 핵심 관계자 등이 앞다투어 “복지 예산을 올리기 위해 안보 예산을 삭감했다”라고 비판했다. 반공 보수의 주특기인 ‘복지 대 안보’ 프레임이 등장한 것이다. 국방 예산은 국회의 통상적 예산 심사 수준인 정부 제출안 대비 1% 삭감(전년 대비로는 4.2% 인상)되었을 뿐이지만, 복지 예산 때문에 안보가 크게 훼손된 것처럼 공세를 폈다.

대선 공약을 ‘선거용’으로 규정한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왼쪽)와 심재철 최고위원(맨 왼쪽). 중도파로 분류되는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오른쪽)과 안상훈 인수위원(맨 오른쪽).

박 당선자의 ‘반격’도 여러 차례 있었다. 당선자는 인수위 모두발언과 의원단 오찬 등 기회 있을 때마다 “대선 공약을 꼭 지켜야 한다”라고 반복했다. 단순한 당위론이라기보다는, 새누리당 등 보수 진영에서 나오는 공약 수정론을 맞받아치는 성격이 짙었다. 김종인 위원장은 배제했지만 인수위에 복지·고용 분야 전문가들을 중용하는 등 정통파 시장 보수와는 다른 색을 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박 당선자가 이런 포지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박 당선자의 진보적 사회경제 공약의 뿌리 정서는 ‘국가가 주도하는 온정적 보수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는 한국 보수의 주류 정서가 아니다. 한국 보수의 양대 축인 반공 보수와 시장 보수 동맹은 임기 내내 박근혜 정부에 지속적으로 우클릭을 요구할 전망이다. 

박 당선자가 이 반공·시장 보수 동맹에 맞설 수 있는 자원이 마땅치 않다. 새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유례없이 낮다. 박 당선자 지지율이 50% 아래로 떨어지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오는 등, 직선제 대통령 중 최초로 절반 이하의 지지율로 정부 출범을 맞이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이철희 소장은 “이명박 대통령도 중도 실용과 강경 보수의 갈림길에서 촛불집회를 얻어맞고 지지율이 폭락하자 선명한 보수로 후퇴했다. 위기 국면에서 기존 보수의 품만큼 안락한 곳이 없다”라고 짚었다. 대중의 강고한 지지가 없는 국면이라면, 물질적·정서적 기반이 탄탄하고 결집도가 높은 주류 보수 블록에 기대고픈 유혹을 받는다. 박 당선자는 후보 시절이던 2012년 10월 이후에 이런 모습을 한 번 보여준 바 있다.

보수 적통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박 당선자의 정서적 뿌리가 진보적 공약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상징적인 장면이 있었다. 2월14일 인수위 고용복지분과 안상훈 위원은 회의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당선자 공약인 창조경제를 시장경제를 넘어 사회적 경제로까지 확장시키겠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등 공동체적 경제주체들을 활성화하겠다”라고 말했다.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주로 진보 진영에서 논의되던 의제들을 과감하게 차용하겠다는 의미다(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안상훈 위원은 스웨덴 복지모델 전문가다). 

보수 정권에서 보기 힘든 파격적인 내용이 나왔는데, 정작 화제가 된 것은 엉뚱하게도 ‘제목’이었다. 안 위원이 이날 발제 내용을 ‘제2의 새마을운동’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과잉 충성’ ‘역사 후퇴’ 논란이 벌어졌다.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경제라는 핵심 의제는 증발되어버렸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엉뚱한 코드 맞추기 때문에 나름 파격적인 의제가 완전히 묻혀버렸다”라는 평이 나왔다. 감성과 문화의 보수성과 정책의 진보성이 어색하게 뒤섞여 어느 쪽으로부터도 선뜻 지지를 받지 못하는 풍경. 박근혜 시대에 되풀이될지 모르는 장면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후 가장 진보적인 사회경제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 박근혜 당선자다. 박 당선자의 공약을 보면 의료 복지와 노인 복지를 강조하는 등 복지국가 건설을 명시적 목표로 내세우는 데다, 사실상 증세의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이 때문에 ‘2007년의 박근혜’와 ‘2012년의 박근혜’를 둘러싼 보수 내전은 야권에도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박 당선자 공약에는 야권도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의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지만, 박 당선자가 보수 주류와 힘겨운 싸움을 이겨내야만 실제 집행이 가능하다. 야권이 받아든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째, 방관한다. 둘째, 보수 주류 동맹으로부터 2012년의 박근혜를 지킨다.

방관은 손쉬운 선택이다. 민주당 내부에는 박근혜 정부의 민심 이반이 상당히 빠를 것으로 예상하는 의원이 적지 않다. 운동권 출신의 한 재선 의원은 박근혜표 대선 공약을 ‘선거용’으로 평가했다. “박근혜 정부는 공약을 지키기 힘들 것이다. 보수의 저항도 저항이지만, 당선자 본인의 철학에서 나온 공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의료복지 공약이 후퇴하고 있다. 대선 공약은 줄줄이 철회될 것이고, 민심 이반도 상당히 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우리만 잘 준비하면 기회는 꽤 빨리 온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빠르면 2014년 지방선거 이전에 민심 이반이 두드러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 

반면 ‘박근혜 지키기’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옵션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반사이익으로 정치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이번 대선에서 뼈저리게 배우지 않았나”라고 반문한다. 보수 주류로부터 박 당선자의 진보적 공약들을 지켜내고, 공약의 각론과 구체적 집행 경로를 오히려 야권이 채워내면서 수권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보수 주류에 포위된 박근혜의 활로를 민주당이 뚫어주자”라는 전략인 셈이다. 

민주당 일각, ‘박근혜 지키기’ 주장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박근혜 지키기’를 민주당 생존전략으로 내놓았다. 민 의원은 1월16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박근혜 정부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지원하고 당론 발의까지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문희상 비대위원장도 “여야 공통 공약은 합의해 의제화하자”라고 제안했다.

복지국가로의 이행에 관심이 많은 한 민주당 정책통은 “복지정책 지지율이 가장 높은 층은 정규직 노동자인데, 그 이유는 이들만이 4대 보험을 통해 복지의 ‘맛’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박근혜표 복지정책이 제대로만 시행되면 자영업자와 비정규직도 복지 혜택을 보게 되고, 그럴수록 복지국가의 지지 기반은 공고해진다. 누가 집권하는가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박근혜 지키기’가 손해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한 민주당 전략통은 “보수 내전을 이대로 놔두면 박 당선자가 보수 주류에 투항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민주당이 박 당선자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하면서 오히려 원군이 되어준다면? 그때는 주류 보수와 정권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는 유난히 신뢰를 강조하는 박 당선자가 가장 신경 쓰는 ‘약한 고리’다. 

정권은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 구분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내부 갈등을 안게 마련이다. 김영삼 정부는 군부독재 세력과 영남 민주화 세력의 연합정권이었고, 집권 초기에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 등 민주화 세력의 의제가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역시 출범 당시에는 보수 주류와 중도실용파의 연합정권이었다. 두 정권 모두 임기 말로 가면서 지지율이 떨어질수록 강한 보수 회귀 성향을 보였다. 박근혜 정권 역시 ‘보수 적통’과 ‘진보적 사회경제 의제’가 어정쩡하게 동거하는 상태로 출범한다. 박근혜 시대의 항로가 궁극적으로 어느 쪽으로 향할지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좌우된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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