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6일 화요일

국민대표석에 ‘민주화 세력’의 자리는 없었다


이글은 한겨레신문2013-02-25일자 기사 '국민대표석에 ‘민주화 세력’의 자리는 없었다'를 퍼왔습니다.

전우용/역사학자

역사학자 전우용이 본 취임식

민주공화국의 대통령 취임식은 선왕의 상중에 치러지곤 했던 왕조국가 왕의 즉위식과는 다르다. 권력의 정당성은 왕통(王統)이 아니라 국민 다수의 위임에서 나온다. 대통령의 취임식은 아무래도 옛 시대의 ‘계승’보다는 새 시대의 ‘창조’에 방점이 찍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에서도 역사는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요 원천 중 하나다. 대통령 취임식은 새 시대의 시작을 선포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표상하는 동시에, 민주헌정의 역사가 중단 없이 진전하고 있음을 알린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계승’을 표상한다.25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도 연속과 단절, 계승과 청산의 메시지가 함께 담겼다. 굳이 ‘국민행복시대’나 ‘희망의 새 시대’라는 구호가 아니더라도 통일신라 진성여왕 이후 1100여년 만에 처음 여성 국가원수를 맞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새 시대’의 상징성은 충분했다. 역사학도에게는, 그보다 대통령이 취임식 행사들을 통해 어떤 역사 계승 의식을 보여줄 것인지가 더 큰 관심거리였다. 다행히 행사를 기획한 사람들이 새 대통령의 ‘역사적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 세심히 배려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취임식 전날 밤의 보신각 타종과 식전 행사를 연 사물놀이, 그리고 여러 ‘아리랑’으로 구성된 취임 축하 공연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희망 복주머니 제막식’은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仗)하여’ 새 대통령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선언한 셈이다.그런데 오래된 과거의 일은 장식적 요소로는 훌륭하지만 실천적 함의는 분명치 않다. 새 대통령의 역사 계승 의식을 엿볼 수 있었던 대목은 그보다는 가까운 과거에 대한 태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앞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joo2821@newsis.com 뉴시스

취임식장 단상에는 이 시대의 과제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상징하는 ‘국민 대표’ 30명이 올랐다. 사회적 소수자, 다문화가정 어린이, 기초과학과 미래 신기술 분야 종사자,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 등이 ‘국민행복시대’를 열기 위한 새 대통령의 ‘과제 인식’을 보여주었다면,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손자, 천안함 구조 작업 중 사망한 고 한주호 준위의 부인, 파독 광부 출신 인사 등은 새 대통령의 역사 계승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였다.새 대통령이 후보 시절 여러 차례 공언했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통합’이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위로와 사과’의 뜻은 보이지 않았다. 새 대통령이 취임식에 초청했는데도 ‘그들’이 거절했는지, 거절하리라 짐작하고 초청하지 않았는지, 애초에 초청할 생각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보 시절의 ‘광폭 행보’와 ‘국민 대통합’의 정신이 퇴색한 반면,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는 분명한 ‘역사 계승 의지’가 두드러져 보였다. 국민대표석과 김대중·노무현이 빠진 전임 대통령 좌석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이명박근혜 동거정부’, 소통을 기대한다 [한겨레캐스트 #46]
 

축제형 취임식을 장식한 공연은 50년대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들로 채워졌다. 그 노래들은 시간적으로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공간적으로는 여러 세대의 공존을 표상했다. 그 노래들은 과거 한국인들이 얼마나 다양한 리듬 속에서 살아왔으며, 지금 한국인들이 얼마나 이질적인 욕망들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서로 다른 삶의 리듬과 상충하는 욕망들을 조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지만, 국가 지도자가 피해서는 안 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새 대통령이 천명한 ‘국민 대통합’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서로 다른 역사 계승 의식들을 조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박근혜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새누리당 대통령으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계승자이며, 존재 자체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적통 계승자다. 하지만 그에 앞서 대한민국 민주헌정의 정통 계승자다. 왕조 국가에서는 새로 즉위한 왕이 ‘새 시대’를 선언하는 것은 불효였다. 그저 ‘선왕의 유지’를 계승하는 것만이 ‘왕통’(王統)을 잇는 올바른 태도였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권력의 정통성은 ‘혈통’이 아니라 다소 변덕스럽고 결코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국민의 뜻’에서 나온다. 왕조 국가에서 ‘변화’가 적었던 것은, 과거를 미래로 연장하려는 관성이 지배적이었던 탓도 크다. 물론 취임식에서 표출된 역사 계승 의식이 이 정권의 미래를 바로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새 대통령이 민주공화국 지도자의 정통성은 역사보다는 민심에 더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국민 대통합의 새 시대’는 구두선에 그칠 수도 있다. 언제나 현재가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전우용/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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