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뉴스앤조이(NEWSNJOY) 2013-02-12일자 기사 '전병욱·오정현 사건으로 본 진정한 회심의 의미'를 퍼왔습니다.
당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제 본 영화 '베를린'에서 간지가 잘잘 흐르는 주인공 두 명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날리는데, 아마도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닌가 한다. '사람은 배신한다.' 명(名)미드 CSI LA의 오리지널 리더인 그리샴 반장도 매회마다 이 진리를 읊조린다. "사람은 항상 거짓말을 하지. 그래서 나는 오직 증거만을 믿는다네."
몇 년 전 보았던 구라 사극 '선덕여왕'에서 실질적 주인공이었던 미실이 죽는 순간 덕만 공주를 기다리며 아들 비담에게 유언처럼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역사적 사실은 많이 왜곡했으나 이 드라마는 주옥같은 명대사를 많이 남겼다. "나는 사람을 얻어 천하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너는 천하를 얻어 사람을 가지려고 하는구나. 사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쿨럭~) 덕만은 아직인 것이냐…" 덕만을 가지기 위해 반란에 참여한 비담에게 미실은 마지막 돌직구를 날린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희망을 걸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배신이란 말 자체가 '신뢰를 등졌다'는 것인 만큼, 일단 먼저 신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믿을 수 없는데, 궁극적으로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과거에 한 신학자는 우리가 훈련하는 '제자도' 자체가 '배신'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앞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교회 문을 나선다. 하지만 그 감동이 사그라지면 금방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새해가 밝으면 매년 중대 결심을 하지만 한 달을 넘기기가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내 자신이 그렇게 변화될 만큼 충분히 훈련되지 않았는데 일시적 충격에 의한 결심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제자 훈련의 한계가 이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체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머리와 감정의 회심이 만들어 낸 수레바퀴로는 변화의 언덕을 넘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심리학에서 '자기 착각' 또는 '자뻑'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하는 '워비곤(Woe Be Gone) 호수 효과'라는 것이 있다. 워비곤 호수는 '힘센 여자들과 멋진 남자들과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녀들'이 사는 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작가인 게리슨 케일러라는 사람이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 이론의 결론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기도 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의리 빼면 시체고, 항상 남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휴대 전화로 통화하면서 운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는 모습을 보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욕을 한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멍청이고 빨리 운전하는 사람은 미친놈이 된다.
이런 착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악의 근원인 '술'과 '담배'도 하지 않으며, 정기적으로 종교 봉사도 하고, 심지어 피 같은 돈까지 헌금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평균 이상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양호한 사람들만 모인 교회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말아야 하는데 솔직히 세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 함정이다.
그들의 자기 착각 혹은 자기 과신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미련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자주 목격한다. 오늘 괜히 휴대폰으로 페북을 열었다가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나의 기분을 망쳐 놓은 오정현 성도의 논문 사건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다른 성도들이 엿새 동안 힘써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느라 미처 돌보지 못하는 예배당 관리와 심방 업무를, 목사라는 전업 직업으로 위임받은 오정현 성도는 목회에 별다른 쓸모가 없는 박사 학위 논문을 오래 전에 (대부분 내용을) 표절 또는 대필로 작성한 강한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런데 내가 실망을 금치 못하는 것은 표절 또는 대필 사실보다도 최근 몇 주간 그가 보이고 있는 최악의 반응들이다(교회 내의 최초 의혹 제기부터 어제 예배 시간에 눈물과 함께 토설한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그 '익사이팅'한 과정은 여기서 열거하지 않겠다). 그는 정말 이 논문 과정만 교회에서 은혜로 덮어 준다면 나머지 목회 생활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교회에서 작은 순서 하나만 맡아도 주말에 아무 일도 못하고 거기 매달릴 정도로 나 자신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많은 나로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대단한 오 성도가 진정 부러울 따름이다.
직장인이 표절로 받은 학위로 높은 직급으로 입사해서 업무를 수행하다가 그것이 들통 날 경우, 그 사람이 다른 업무에서는 정직하게 회사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리라고 믿어주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언론에 드러난 성폭행만 잘 덮어진다면 (13억 원이나 챙겼으면서 아직도 목사라는 직업에 연연하고 있는) 전병욱 성도가 앞으로는 여성도의 손도 잡지 않고 경건한 목회를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런 사실을 판단하는 데는 우리의 세상적 상식이 예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전병욱 본인은 정말 자신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 개척 잘 해서 스캔들 없이 교회를 운영해 가는 모습을 빨리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나는 잘할 수 있는데 왜 세상이 안 믿어 주느냐는 원망이 설교 곳곳에 배어 있다. 나는 오정현, 전병욱 성도의 표정과 말을 보면 '이번만 넘기면' 앞으로 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일까? 그들이 변화되었다고 믿을 만한 아무런 계기를 본 것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매일 지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시계를 5분 빨리 가도록 맞추어 놓았다고 생각해 보자. 하지만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방법은 별로 소용이 없다. 나는 이미 이 시계가 5분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산해서 움직이게 되고 결국 또 지각을 하게 된다. 괜히 계산하는 데 머리만 더 아프다. 이 방법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내 시계를 앞으로 맞춰 놓아야 한다. 내가 정말 그 시계가 사실이라고 믿어야 상황은 변화될 수 있다. 신앙이 있으면서도 반복적으로 범하는 죄가 사라지지 않고, 옛 습관에 사로잡혀 있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면, 내가 믿는 신앙을 내가 정말이라고 믿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반문해 봐야 한다. '이번 한번만 죄를 짓고 앞으로 손을 씻겠다'는 말은 자신이 변화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돈이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간구해도 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런데 돈에 대한 목적 지향성을 포기하고 단순히 수단화, 상대화 하는 사람에게는 종종 많은 재물을 허락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의미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는 사실 큰돈이 별로 의미가 없다. 맡기신 주인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성숙한 사람에게 많은 재물과 성공이 주어지는 것에는 별로 배를 아파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자랑거리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의 성공은 배설물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의 성공에 마음이 힘들어진다면 그는 그리 성숙한 사람이 아닐 것이므로 오히려 그를 긍휼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지 배 아파할 필요는 없다.
"Who am I?" 장발장처럼 두려움·공포 직면해야
내가 생각하는 가장 두려운 공포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확한 인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Can you imagine more dreadful thing than your spirit is splited into multiplicity?"(당신의 영혼이 여러 개로 쪼개지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두려움과 직면하는 것이 성찰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나는 장발장이 "Who am I?"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세 번 보았다. 미리엘 주교의 용서에서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삶을 증오에서 용서로 돌이키는 장면, 애꿎은 사람이 장발장으로 오인 받아 가석방 위반으로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된 상황에서 자수를 결심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코제트를 떠나면서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무한한 고전의 힘을 느꼈다. 사람의 변화는 저렇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는 회심한 이후 평생을 "Who Am I?"를 끊임없이 외치며 살았고 모든 일에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성찰했다. 그는 평생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보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원칙과 사랑을 겸하여 추구함으로써 두려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원칙만을 추구한 자베르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는 미리엘 신부의 말은 그의 영혼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수용하지 않아도, 나는 기다려 주고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해 주기로 결심하는 것은 결국 두려움을 이기는 변화의 힘을 준다.
만약 회심한 장발장이 과거의 자신의 성추행과 논문 표절 문제에 직면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시장 직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과 꼼수로 일관했을까. 그의 삶의 결정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승리하는 선택이었다. 자기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것,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 아닐까.
나는 한두 번의 실수로 넘어진 목사 직업을 가진 성도들을 매도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완벽한 사람은 결코 없다. 그리고 그 분들을 비난하는 성도들의 상당수도 아마 '워비곤 호수 효과'처럼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다.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은 자칫하면 정의만 외치다가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자베르의 확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수준이 결코 지도자가 될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결국 자신들이 심각한 범죄를 예사로 여기는 중독 또는 만성 불감증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보인다. 이것은 영혼의 multiplicity이며, 심각한 자기 착각이자, 제자도의 배신행위다. 이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정한 자기라고 착각하는 유아기의 '상상계'(라캉)이며, 허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낙타(니체)이며, 욕망이 실재라고 믿는 돈 후안(키에르 케고르)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지도자나 성도나 모두 이런 자기 착각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허상을 쫓고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비극이다.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 자체가 공포이고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심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괴로워하는 제자 후보생들은 어디에 있는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닌 미리엘 신부 같은 사람들을 삶 속에서 자주 목격하면서도 그들을 홀대하고, 오히려 복을 내려 줄 능력이 있을 것으로 믿는 종교 지도자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무속의 성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으로 그들에게 삶의 어느 순간에 깊은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막다른 길에 갇혀서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상태에 처한 자신의 모습에 절망할 날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상태에서 다시 공동체와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꿈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규창 /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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