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고문, 당신도 아파보라’


이글은 2012-11-22일자 기사 '‘고문, 당신도 아파보라’'를 퍼왔습니다.
영화 는 시종일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벌어지는 고문을 보여준다. 정지영 감독은 “우리가 같이 아파봐야 민주주의가 훼손될 때 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필, 봄이었다. 경기도 양평 양수리 종합촬영소에도 꽃이 피었다. 숙소로 쓰는 후생관부터 6세트장에 이르는 길목에 꽃이 만발했다. 이른 아침 촬영장에 가는 거리, 햇빛은 그게 전부였다. 세트장은 암흑이고 촬영이 끝나면 늦은 밤이었다. 먼지 구덩이에서 8명의 남자 배우가 뒤엉켜 한 달 반 동안 영화를 찍었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를 재현한 세트장에는 욕조, 변기 따위가 전부였다. ‘감옥 생활’이라는 비유 그대로 (남영동 1985)의 스태프와 배우에게 지난 5월은 잔인한 봄이었다. 

1982년에 데뷔해 17편의 영화를 만든 정지영 감독에게도 (남영동 1985)는 가장 힘든 영화였다. “처음엔 왜 내가 힘들지? 화창한 봄날 그런 데 있어서 그런가 생각했어요.” 뒤늦게 고문 장면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고문당하는 연기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게 그에겐 고문이었다. 당사자인 배우 박원상은 더했다. 촬영을 끝낸 밤, 다시 그 길로 돌아오며 손이 매운 동료 배우 이천희와 이경영을 미워했다. 두 사람은 고문 수사관 역을 맡아 박원상의 입과 코를 거즈로 덮고 물을 들이부었다. 타고난 체력을 가진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사IN 이명익 <남영동 1985>를 연출한 정지영 감독.

11월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영동 1985)는 알려진 대로,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원작으로 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던 1985년 9월 김 전 의원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붙들려가 22일간 하루 한두 차례 5시간씩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의 배후로 지목됐고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조작된 혐의를 인정했다. 이후 전기고문의 유일한 흔적인 발뒤꿈치 상처를 통해 고문 사실을 밖으로 알렸고, 부인 인재근씨(현 국회의원)는 가수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그의 진술을 녹음해 미국 인권단체에 군부정권의 고문 사실을 알렸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말보다는, 남영동 고문 장면에 집중한다. 정 감독은 영화적 설정에 방해되는 부분을 제거했다. 관객들과 함께 고문실에 갇히고 싶었다고 한다. 같이 아파보자는 의도였다.  

“고문 기술자의 웃음을 잊을 수 없다”

자전적 수기 (남영동)에서 김근태 전 의원은 말한다. ‘1985년 초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 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손을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전기고문 기술자(이근안) 입에 번졌던 소리 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영화는 그 참담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러닝타임 106분 대부분은 고문 장면이다. 각오하고 본 관객으로서도 쉽지 않다. 특수한 고문대인 ‘칠성판’도 자주 등장한다. 고문의 강도보다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게 절망적이다. 왜 관객을 이렇게 아프게 하나. 정지영 감독은 그걸 의도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를 던져가면서 알량한 민주주의를 얻어냈는데 힘 안들이고 얻어낸 많은 사람들은 그걸 공짜로 얻은 양 생각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훼손되어도 누가 해결하겠지 이런다. 같이 아파봐야 그럴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정 감독이 고문 가해자에 대해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은 건 1980년대 후반. 장선우 감독이 고문 경찰관 이야기를 그린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영화화하기로 했다가 무산되면서였다. 가정에서는 성실한 가장인데 일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문 경찰관의 이야기를 보고 ‘고문하는 사람도 인간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이야기를 써두었다. 사석에서 소설가 천운영씨에게 말했더니 그가 소설로 쓰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온 소설 (생강)은 인간의 야수성을 작가 특유의 세계관으로 잘 묘사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가 영화화하려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난 1월 (부러진 화살) 개봉 즈음 김근태의 부음을 전해 듣고 (남영동)을 읽었다. 정 감독은 “내 숙제를 이렇게 해결하자. 이거다,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고문 피해자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연출부와 충주의 작은 농장에 들어가 한 달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던 박원상은 이번 영화 이후 그 트라우마가 사라졌다고 한다. 연출부의 주문은 단순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도저히 못 견딜 때 몸으로 표현하기로 한 것. 그는 “고통이 관객에게 최대한 전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원작 속 김 전 의원을 흉내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와 22일간 고문당한 김종태의 캐릭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극중 배역의 이름은 김근태, 이근안이 아니라 김종태, 이두한이다. 야만의 시대, 고문을 당한 사람이 김근태 한 명은 아니기 때문이다(28~31쪽 관련 기사 참조).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배우 이경영씨(오른쪽)가 고문 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다.

배우 이경영은 고문 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한 후 김근태 전 의원의 부인 인재근 의원에게 사과하고 눈물을 떨궜다. 영화를 보던 인 의원은 전기고문 장면에서 눈을 감았다. 오히려 고문 기술자(이경영)의 고문 장면은 괜찮았다. 전문가가 아닌 다른 사람(명계남)이 물고문을 하는 장면에서는 잘못해 죽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자전 수기에서 인간백정으로 묘사되는 이근안은 델타 상표의 사무 가방을 메고 출장을 다니는 전기고문 분야의 전문가였다. 이름 대신 장의사라 불렸다. 이경영은 이근안과 관련된 자료를 부러 보지 않았다. 그에게 동정심이 생길까봐서다. 실제 90㎏에 육박하는 거구의 이근안과 그는 닮지 않았지만 대신, 손이 두꺼웠다. 

영화 속 고문 장면 내내 함께 하는 건 라디오 소리다. 고문하는 중에도 수사관들은 프로야구 중계를 듣는다. 실제 수기에도 나온다. ‘정말 미웠던 것은 구걸하는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아니었다. 라디오 소리였다.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영화 속 고문관은 발톱을 깎고 김종태에게 연애 상담을 한다. 정 감독은 되도록 고문 수사관을 생활인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들이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남영동 1985)는 (부러진 화살)과 마찬가지로 5억원 규모의 저예산 영화다. 스태프·배우 모두 노개런티로 참여한 덕이다. 문제는 배급이었다. 편집본을 본 메이저급 배급사 관계자들은 난감해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이후 반응이 좋자, 다시 한번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 감독은 “영화는 괜찮은 것 같은데 꺼리는 걸 보고 아 이게 민감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라고 회상했다. 그가 짐작하는 민감함의 이유는 영화가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로도 해석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권이 들어설지 모르니까 사업에 지장을 주는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걸 염려하는 거다. 그러니까 얼마나 슬픈가. 아직도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대선 전 개봉을 목표로 한 건 정지영 감독의 의도다. “대선에 영향을 끼치면 좋겠다. 어떻게는 나도 모르겠다. 아픈 과거사의 단면을 본 후보자들의 반응이나 그 반응을 본 관객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본다.” 

정 감독은 생전의 김 의원과 몇 차례 인연이 있다. 스크린쿼터 운동을 할 때 그에게 전화가 와 (김 전 의원이 관여했던) 한반도재단 이름으로 공로상을 주겠다고 했다. 2008년 촛불 정국 때 청계광장에서도 만났다. 정 감독을 보고 김 전 의원이 “여기 정지영 감독도 와 계십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김 전 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시절 복역 중인 이근안을 만난 적이 있다. 그를 용서했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이후에도 괴로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지영 감독은 묻는다. “김종태 개인이 이두한을 용서했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문제인가? 김근태 의원도 용서를 못한 게 괴로웠나보다. 어느 목사한테 얘기했더니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고 한다. 그건 당신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고.” 감옥 안에서 용서를 빌던 이근안은 출소 후 ‘심문은 예술’이라고 말을 바꿨다.

ⓒ시사IN 자료 경찰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 김근태 전 의원이 있던 5층은 창이 유난히 작다.

‘기억에 관한 영화’ 젊은 세대도 봐야

박원상은 이 영화를 ‘기억에 관한 영화’라고 정의했다. 그러니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가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봤으면 한다는 것. 강 과장 역을 맡은 배우 김의성은 “(영화가) 대선용 좌파 선전 영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대선보다 크다. 과거로 갈 건가 더 나은 미래로 갈 건가 판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11월6일 오전, 지금은 경찰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시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단체가 아니면 찾는 이가 뜸하다고 한다. 김근태 전 의원이 있던 5층 15호실은 구석에 있고 15개 방 중 큰 편에 속한다. 지금은 변기와 세면대만이 그 흔적을 말하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죽은 9호실만 보존되어 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의 5층 창은 다른 층에 비해 유난히 작다. 오전 시간에도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김근태 전 의원은 27년 전 이 남영동 대문을 나와 구치소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비로소 살았다는 걸 깨달았던 것. 영화 (남영동 1985)에서도 햇빛을 찾기는 어렵다. 촬영장에서부터 인색하더니 상영 시간 대부분도 암흑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러니 더욱더, 햇빛이 절실했던 시대의 이야기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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