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일 수요일

5.16 세력 '구국혁명'커녕 사리사욕 싸움질


이글은 프레시안 2012-07-31일자 기사 '5.16 세력 '구국혁명'커녕 사리사욕 싸움질'을 퍼왔습니다.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 5.16군사반란의 원인, 군내 파벌과 승진불만

5.16군사반란에 대해 구국의 혁명이니 사회혼란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니 하는 역사왜곡이 등장했다. 새누리당의 대통령예비후보인 박근혜 의원이 내놓은 나름의 역사평가다. 그러나 그 발언은 박 의원이 5.16군사반란 주모자 박정희 소장의 딸로서 사인(私人)의 입장과 공당의 대통령예비후보라는 공인의 역사관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박 의원이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계속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니 자신감이 지나쳐 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확고해진 정치적 위상을 이용해 아버지 박정희가 자행한 헌정유린까지도 무리하게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언급은 박정희의 딸로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몰라도 정면으로 '구국의 결단'이니, '최선의 선택이었다'느니 하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국민여론층에서 그렇게 만만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 역사 왜곡이 될 소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식민지배가 불가피했고 결과적으로 근대화에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역사왜곡과 동일한 논리가 아닌가.

헌법전문 '3.1운동과 불의 항거 4.19민주이념 계승'4.19혁명 짓밟은 5.16군사반란 미화는 헌법정신 유린

박근혜 의원은 그런 발언을 한 후 자신의 말을 지지하는 국민이 50%가 넘는다고 했다. 그 국민만 투표를 한다고 해도 박 의원은 이미 대통령 당선이다. 그러나 그 50%는 허수였다. 한겨레가 사회여론조사연구소와 함께 벌인 정기 여론조사(7월27~28일)에서 박 의원의 5.16군사반란 정당화에 대해 "동의한다"는 응답은 37.2%에 불과했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훨씬 많은 49.9%로 나타났다.

특히 박 의원의 5.16군사반란 합리화에 대한 반대는 20대에서 64.9%, 30대 61.9%, 40대 57.7%로 높게 나왔다. 50% 이상 동의를 보인 연령대는 60대 이상에서만 58.5%였으며 50대도 47.1%였다.

60대 이상이라면 5.16군사반란 때 10대, 유신 때 20대여서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교육받고 또 고도로 통제된 언론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이 형성된 세대다. 지금도 머릿속에 개발독재와 강권통치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식의 정치교육을 받은 악영향이 유산처럼 남아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반민주적 1인 독재체제인 유신헌정을 강행해 놓고서 그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예찬하는 극단적 우민화 조작을 하던 정권이었다. 그에 비해 2040세대는 5.16 군사반란 때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유신 때도 유아기였다.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치의식 면에서 오염되지 않은 세대다. 이들 중 다수의 자율적인 의식과 판단은 5.16군사반란을 합리화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여기서 60대 이상 세대 중에서 5.16군사반란에 의해 짓밟힌 당사자 그룹인 4.19혁명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 단체로는 4.19혁명 유족회와 부상자회가 국가보훈처에 등록돼 있다. 보훈처에 등록하지 않은 채 광범하게 4.19혁명 참여자들이 자율성을 견지해온 단체가 '사단법인 사월혁명회'(상임의장 정동익)라 할 수 있다.

사월혁명회는 7월26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정례발표회를 갖고 박근혜 의원의 5.16군사반란 미화 발언에 대해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헌법은 전문(前文)에 딱 두 가지의 역사적 사건과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기했다. 하나는 항일 자주독립 정신으로 3.1운동을 들었고 두 번째가 반독재 시민혁명 정신으로 '4.19민주이념'이다. 이는 국민 합의의 결과다.

그런데 5.16군사반란은 4.19혁명 정신에 바탕한 제2공화정 헌법과 민주당 정부를 짓밟고 정권을 찬탈했다. 박근혜 의원은 그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군사반란을 불가피하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미화하고 있다. 그것은 '4.19민주이념'이 명기한 헌법정신에 대한 부정이 아닐 수 없다.

사월혁명회 성명 "5.16군사반란 미화는 제2의 쿠데타 기도"

사월혁명회는 이날 성명에서 "박근혜 의원은 공당의 대통령 예비후보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4월혁명을 짓밟은 5.16 군사반란을 단죄하는 취지로 4.19민주이념을 대한민국헌법 전문에 규정한 헌법정신에 대한 입장을 먼저 명백하게 밝히라."고 요구했다.

성명은 이어 "박 의원의 5.16 군사반란과 유신체제에 대한 망언을 '제2의 쿠데타 기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맹비난하고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군사반란을 정당시 하는 위험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새누리당 박근혜의원은 5.16을 군사반란으로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규탄했다.

5.16군사반란이 과연 구국의 혁명인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1961년 5.16과 63년 이른바 민정이양, 그리고 65년 3차 반혁명사건까지 분석적으로 정리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서도 최소한 5년 동안 내부 권력투쟁과 검은 정치자금 조달로 나라 전체를 정치적 혼란과 부패상 아래 추락시켰다. 그러면서 4.19혁명 과정에 대해서는 불과 1년을 혼란상으로 규정하고 정권찬탈의 명분으로 삼았다.

5.16군사반란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군 장교 인사적체와 정치군인 발호였다. 군사반란의 주모자들은 군 인사에서 소외된 그룹이었다. 당시 군내 파벌은 지연과 학연, 장교임관 구분 등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과 함께 '하극상파' 형성

5.16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전 4.19혁명 전후 군내 파벌은 크게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일본군 ⧍만주군 ⧍동북(함경도)파 ⧍서북(평안황해)파 ⧍중남부(경기충청)파 ⧍정군운동과 하극상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5.16 이후 박정희 정권아래서 기승을 부린 영남(대구경북과 경남)군벌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첫째,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은 해방 후 창군 때 군 수뇌부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중국군(장개석 국민당 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초대 국방장관, 일본육사 출신이지만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미군정 아래서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으로 1946년 한국군 경비대 총사령관을 맡은 송호성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범석은 1946년 민족청년단장, 48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자유당 부당수, 4.19혁명 후 참의원 등 정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창군 초기 광복군 정신의 계승 원칙을 천명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육사 출신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것은 김구 세력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 책략을 이범석이 실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의 주류는 김구가 관여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서 교육받은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자연히 김구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조직화할 수 있었다. 이것을 이승만이 그대로 둘리 없었으며 광복군계는 군요직에서 차례로 제거되고 만다. 그 뒷자리를 차지한 것이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유동열은 1919년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을 역임, 광복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을 하다가 해방후 환국했으나 6.25 때 납북당했다. 송호성은 6.25 전쟁 중 자진 월북하여 국군의 발전에 기여한 바 없으며 북한에서 강계 월북자 재교육훈련소의 소장으로 일했다.

둘째, 일본군계는 일본육사와 학도병과 지원병 출신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주류는 일본육사계였다. 일본육사 출신의 주류는 창군 초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4.19혁명 직후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을 지낸 이종찬, 그리고 6.25전쟁 때 육본 작전국장과 남부지구경비사령관을 지낸 이용문을 3걸로 꼽을 수 있다. 해방후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그리고 51년 휴전회담 대표와 56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도 일본육사계의 거물이다.

이들은 일본육사에 입학한 후 계림회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도쿄에 있던 영친왕은 계림회를 위하여 방을 얻어주고 과자와 과일 등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계림회 아지트는 조선인 일본육사 출신 선후배들의 친목모임 장소였으며 모임은 해방 때까지 지속됐다.

일본군파 이종찬, 이승만의 군 동원 거부로 육참총장직 해임

이 중 특히 이종찬은 1952년 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참모총장이던 그에게 1개 전투사단의 동원을 명령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찬은 이승만이 국회의원들과 언론을 협박하기 위해 군을 이용하려 하자 전방 전투부대 부족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였지만 부당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자 항명한 것이다. 이종찬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고 사실상 미국으로 추방조치 당하고 말지만 그는 군 안팎에서 참군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승만은 군의 정치적 이용을 거부한 이종찬의 항명 이후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장성을 중용하지 않았다. 이종찬의 후임은 백선엽이었으며, 52년 부산 직선제 개헌파동 때 이승만의 군 동원 명령을 이행한 사람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으로 모두 만주군 출신이다.

일본육사파 채병덕은 6.25전쟁 중 하동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용문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53년 비행기 사고로 전사하고 만다.

일본군파는 또 일본육사 출신과 지원병 하사관 출신 간에 알력이 심했다. 하사관 출신으로는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했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임관한 송요찬과 최경록이 대표적이었다. 송요찬은 4.19혁명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육참총장 재직 때 군의 부패 척결에 앞장섰으며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보스로 상당한 군벌을 형성했다. 5.16군사반란 후 국방장관과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최경록은 5.16 때 박정희가 부사령관이던 2군의 직속상관 사령관으로 처음에 군사반란에 반대했다가 차츰 묵인 자세를 취했다. 유신 후에도 교통부장관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일본군계는 학병 출신도 상당수 군 수뇌부에 진출했다. 5.16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초기 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됐으나 반혁명 혐의로 투옥된 장도영, 민주당 정부 때 육참총장 재임시 정군운동의 표적이 됐던 최영희, 그리고 5.16 때 육사교장으로 군사반란에 반대하다가 구금된 강영훈 등이 학병 출신이다.

이승만, 김구 관련된 광복군 거세 후 일본군파 중용일본군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파 키워 일본군파 견제

셋째, 만주군파는 이승만이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을 거세한 뒤 중용했던 일본군파가 비대해지자 다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세력이다. 특히 52년 부산 직선제개헌 파동 때 만군 출신이 군의 정치적 이용에 공을 세운 후 육군참모총장을 백선엽(두 번 중임)과 정일권이 독과점하면서 만군계가 급성장했다.

만군파는 초기의 봉천군관학교와 그 후의 신경군관학교로 나뉘지만 함께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으로서 만주에서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경쟁하면서 교육받아 동병상련 관계로 단결력이 강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정일권과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백선엽 등이 유명인사다. 신경군관학교 출신은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박정희 이한림 강문봉 김윤근 등이다. 이 중 5.16 당시 제1야전군 사령관이던 이한림은 처음부터 군사반란에 반대했으나 나중에 박정희에 회유당하고 공직에 참여한다. 또 5.16에 가담했던 군단장 김동하와 박임항은 나중에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한다.

이들 중엔 만주군관학교 우수졸업자로 일본육사에 편입한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 박정희 이한림 이주일 박임항 강문봉 김윤근 등이 그들이다.

신경군관학교 출신 중에 이주일(감사원장 지냄) 윤태일(중앙정보부 차장 지냄) 등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많이 배출됐다.

넷째, 동북(함경도)파로는 정일권, 이한림, 강문봉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다섯째, 서북(평안황해)파는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를 중심으로 파벌을 이루었으며 여섯째, 중남부(경기충청)파로 이형근 박병권 김종오 민기식 최경록 등이 보스 노릇을 했다.

군내 소외된 육사5기와 8기 하극상파가 5.16군사반란 꾸며

일곱째, 4.19혁명과 5.16군사반란을 전후해서 학연과 지연으로 유력한 파벌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군 인사에서 소외된 불만세력이 이른바 정군운동과 하극상사건을 일으킨다. 이들은 만주군 출신내의 비주류, 미군정하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임관한 육사5기 그룹, 정부수립 후 첫 육사출신 장교가 된 육사8기 그룹이었다.

4.19혁명 이전 이승만 정권아래서 정군운동은 인사적체 때문에 발화됐다. 계급사회인군대에서 승진이 막혀있다는 것은 가장 심각한 불만사항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군 수뇌인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직을 소수의 몇 사람이 2~3회씩 중임하는 독과점식 인사정책을 유지했다. 이유는 창군된 지 오래되지 않아 장성들의 나이가 젊었고 또 이승만도 새로운 사람보다는 손에 익은 장군을 계속 중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은 참모총장을 각각 두 번씩 중임했으며, 함참의장의 경우 김종오는 3대나 연임했다. 또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는 합참의장도 하고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 결과 육사5기의 경우 대령에 7~8년이나 머물러야 했고 8기생은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8년이 소요됐다.

특히 기록적으로 1300여명이 임관한 8기는 승진적체에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임관한 동기생 중 절반 정도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됐음에도 5.16 이전 1차 대령 진급자는 7명에 불과했다.

이들 8기생은 총리와 국방장관을 찾아가 육군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을 제시하는 등 하극상 행동에 들어간다. 8기생 8명이 하극상을 벌였다 해서 8-8그룹이라 불리는 이들이 나중에 5.16군사반란의 주모그룹이 되는 것이다.

김종필 김형욱 신윤창 길재호 옥창호 석창희 최준명 오상균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최준명 오상균은 육본에 8기생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소개'방침에 따라 지방에 전보되는 바람에 5.16주체세력에 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8기그룹은 또 5.16군사반란 주모세력 내부에서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 등의 5기그룹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치러야 했다.

 
▲ 5.16군사반란 주모세력 내부 육사5기의 중심인물 김재춘(제3대 중앙정보부장)과 8기의 리더 김종필(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치열한 권력 각축전을 벌였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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