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4일 목요일

체벌 과외와 체벌 학원, 한국 교육과 사회의 속살


이글은 미디어스 2013-04-03일자 기사 '체벌 과외와 체벌 학원,  한국 교육과 사회의 속살'을 퍼왔습니다.
‘인권조례’가 폭력의 외주화와 민영화를 낳는 이유에 대해

▲ 2일자 문화일보 1면 기사


2일자 문화일보는 1면 하단에 (체벌하는 과외·학원 찾는 학부모)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2일 서울 지역 사교육업계에 따르면 새 학기를 맞아 일부 학부모들이 체벌항목표 등을 직접 만들어 과외강사 및 학원에 요청하거나 기존 규정보다 강한 체벌을 요구하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고 “학생인권조례로 일선 중·고교에 체벌금지 분위기가 자리 잡으면서 학교에서 관리가 잘되지 않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체벌과외’나 ‘체벌학원’을 찾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다”며 그 원인을 '학생인권조례'에서 찾았다.
‘조중동문’이란 조어로도 묶이던 보수언론이 ‘학생인권조례’를 ‘디스’하는 기사라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문제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보수주의자의 편견을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 ‘체벌 사교육’의 문제는 학생인권조례 이전에도 있었다.
가령 방학기간 중에 운영되는 기숙학원의 체벌 및 인권유린 실태는 학교보다 훨씬 심각했지만 공론화된 적이 없다. 학부모와 학생의 동의하에 운영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숙학원 학생들은 나가면 반드시 고발하자고 서로 약속했지만 결국 퇴소하면 흐지부지되더란 종류의 ‘괴담’은 예전에도 있었다.
왜 한국의 학부모들은 공교육에서 체벌을 해주지 않으면 사교육이라도 찾아가는 걸까. 물론 학벌사회의 차별이 성인에게 부과하는 아픔의 크기가 미성년자에게 부과되는 체벌의 아픔의 크기보다 크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와 교사들은 청소년들에게 네가 맞는 매의 아픔은 네가 대학에 가지 못했을 경우 받게 되는 온갖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틀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래봤자 대학을 못 가는 이들이 생기고, 대학 내에서도 층층상하의 서열구조가 있으며, 인권을 반납하며 미칠 듯이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이탈하려는 이들도 생기는데, 체벌의 물리력은 이 폭력적인 입시전쟁 체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학생들의 이탈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
학부모와 학교가 체벌 이외의 대안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학생들은 입시교육을 위해 이미 온 생활을 저당 잡혀 있으므로 추가적인 제재조치를 상상하기가 곤란하다. 가령 곽노현 전 서울교육감이 체벌 대신 도입한 성찰교실이 하교시간을 늦춘다고 생각해보자. 오후 3시부터 축구나 농구를 하는 청소년에게 이건 자신의 행동을 통째로 뜯어고쳐야할 엄청난 강제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청소년보다도 미성숙해 보이는 예비군 아저씨들이 집에 제 시간에 가기 위해 퇴소식만큼은 잠깐 군기를 잡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도 학원을 가거나 자율학습을 할 뿐이지 ‘학습’의 영역에서 퇴장하지 못한다. 학원시간에 늦을까봐 성찰교실 참여를 저어할 정도의 학생은 대개 교사와 심하게 대립할 일도 없으니 그 ‘제재력’을 내세우기는 민망하다.
벌점제도의 제제력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운영되는 외국인학교들의 경우는 벌점내역을 생활지도부에 상세히 기록하기 때문에 수업방해나 반항은 상상도 못한다고 전한다. 미국 대학은 성적 못지않게 인성도 중시하기 때문에 벌점이 대학진학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나 한국에선 학교 측에서도 명문대를 많이 보내는데 목숨을 거는지라 굳이 학생의 발목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벌점은 별 것도 아닌 일에 상점을 준다든지 해서 금세 없애버린다.
단순히 교육제도를 바꾼다 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담론에서도 ‘핀란드 교육법’, ‘독일 교육제도’ 식의 선진국 교육제도에 대한 탐구가 유행이다. 그만큼 학부모들의 관심이 크기 때문일 텐데, 보수담론이 미국 교육의 방식을 주장할 때 진보담론은 북구나 독일·프랑스 쪽을 참조하는 식이다. 하지만 한 사회의 교육제도는 그 사회의 다른 영역과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가령 독일에서 교사는 학생의 점수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 중산층 부모의 자녀가 교사의 박한 평가에 의해 직업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라도 부모들은 항의 없이 그것을 수용한다. 이런 방식을 한국에 그대로 들여온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도입되더라도 우리가 보게 되는 건 학부모들의 끝없는 항의전화, 교사들의 부정채점에 대한 의혹, 수능 체제보다도 더 폐쇄적인 계급재생산(부잣집 아이들이 높은 점수를 받게 되는 현상)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당장 수능의 획일화에 대한 보완책으로 도입된 논술이나 입시사정관제도조차 조기유학 다녀온 부유층 자녀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단 의심을 사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후자의 경우 그 의심은 거의 현실이기도 하다.
한국 학부모와 독일 학부모의 교육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근본적인 차원을 살피려면, 독일사회는 직업학교를 선택한 노동자들에게도 적당한 소득을 안정적으로 누리는 꽤 괜찮은 삶을 보장한다. 한국에서 이런 제도가 채택되려면 일단 최저임금부터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 실업학교에서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면서 노동현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교육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망상과도 같은 얘기다.

결국 학부모가 체벌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고찰하다보면 낮은 인권의식 뿐만이 아니라 현행 입시제도의 문제, 학벌사회 및 학력 간 임금격차의 문제, 노동시장의 문제 등을 모두 접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매우 부자거나 자녀의 삶에 무관심하지 않은 다음에야 한국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심각하게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체벌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학생인권조례가 애꿎은 부모들만 귀찮게 한다”는 보수언론의 의도에는 휘말리지 않더라도, 학생인권조례가 청소년 인권문제에 있어 단지 출발일 뿐이라는 인식은 해야 할 것이다. 사회체제의 강고함은 학생인권조례가 체벌을 금지하면 체벌의 외주화와 민영화를 유도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체벌을 근절하는 것은 학교체벌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윤형 기자  |  a_hrim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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