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최장집칼럼]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과 토크빌

이글은 경향신문 2013-04-29일자 기사 '[최장집칼럼]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과 토크빌'을 퍼왔습니다.

지난달 도쿄대 한국연구센터와 언론학부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2세대 학자인 크라우스 오페 교수와 더불어 기조 발표를 했다. 그는 세계적인 정치사회학자이자 민주주의 이론가이다. 덕분에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다. 오페가 독일을 포함하는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토대로 말했던 것에 비해, 필자는 신생민주주의 국가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말했다. 핵심은 필자가 ‘시민운동적 민주주의관’이라고 불렀던, 뉴미디어의 효능을 앞세운 운동 중심의 민주주의관과 그것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모두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이론가’로 평가되는 알렉스 드 토크빌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오페의 주제는 현대의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면서 그에 대한 제도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한 실망 내지는 불만이 정치 불신과 냉소, 무관심 같은 반정치주의적 태도를 광범하게 불러오는 원천이 된다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은 ‘불만스러운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탈정치화에 대한 민주적 투쟁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에서 이탈한 시민들을 어떻게 다시 정치영역으로 불러들여 적극적 참여자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오페가 토크빌의 이론을 끌어들였던 것은 이 대목에서였다. 즉 어떤 조건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계몽적인 시민, 즉 ‘이념형적 민주시민’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가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가 사용한 토크빌의 텍스트는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였다. 토크빌의 요점은 이런 것이다. 미국사회가 민주주의의 원리인 평등의 조건을 실현했을 때 시민들은 평등이 가져온 평범함을 공유하고 다수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수의 전제정’으로 퇴행할 수 있고, 시민들의 자유가 상실될 위험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자유를 실현코자 하는 시민들은 ‘자율적 결사체의 예술’을 통해 중앙집중화된 국가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자치 정부를 형성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토크빌이 볼 때 그 핵심은, 민주주의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풍습을 가능하게 하는 시민의 덕(德)에 있었다. 여기에서 오페는 토크빌의 아이디어를 빌려 민주적 참여의 습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발견하려 했다. 이 경우 공화주의적 전통에 따른 시민적 덕에 의존한다면, 시민에게 지나치게 도덕적 부담을 요구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민의 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시민을 계몽적이게 할 수 있는 제도들을 그 자리에 대체한다는 발상이다. 오페는,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정치참여만을 통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참여의 효능감을 가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정책결정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기존의 제도적 문제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에 대응하여 시민성을 확대하고, 정치적 행위의 ‘가능의 공간’을 여는 여러 형태의 제도개혁이 필요했다. 통치엘리트에 대한 책임(성)의 강화와 시민의 의사와 선호 표출이 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정치참여 내지 정치과정에서의 시민참여가 확대·개방되어야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위한 제도의 도입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정당이나 정치인들에 의해 던져진 이슈들을 놓고 선거에서 찬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선호를 형성하는 최초 단계에서부터 이니셔티브를 시민들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민들이 선호를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계몽된 시민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을 사례로 말하는 필자로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 또는 위험에 빠트리는 상황을 진단하는 것 자체부터 오페와 달랐다. 우리의 경우는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그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 내지 정치참여로부터의 철회가 중심 문제가 아니다. 토크빌이 나쁜 사례로 삼았던 당시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중앙집중화된 국가권력과 허약한 자율적 결사체가 만들어낸 원자화된 개인이 마주 대하고 있는 상황, 즉 이 양자 간의 힘의 극심한 불균형 상태와 그것이 빚어내는 문제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강한 국가-허약한 시민사회 관계가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말한다. 따라서 처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국가-시민사회 간의 비대칭적 힘의 관계를 더 균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시민사회를 강화하느냐, 어떻게 자율적 결사체를 강화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시민의 힘과 선호를 최대한 축약, 단순화해서 힘을 결집하고 조직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자 변화의 주체로서 좋은 정당을 만들고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오페의 문제의식이 시민참여의 확대와 그 효능에 두어진 사회학적 접근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때, 필자의 경우는 시민의 신념과 의사를 효과적으로 조직해서 정치적 동력을 창출하고 의미있는 결과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는 정치적 접근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토크빌의 텍스트 가운데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못지않게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핵심 아이디어는, 민주화의 효과를 두 수준으로 나누어보는 것이다. 하나는 국가권력의 구조변화를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과 태도, 가치, 권위의 위계구조와 같은 사회의 변화이다. 이를 통해 토크빌은 혁명이 가져온 격변적 정치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과도한 성장과 짝을 이루는 권력의 중앙집중화가 변화되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혁명 이후 권력구조는 구체제와 높은 연속성을 유지할 뿐 아니라, 대중 참여를 통해 정책과 법이 결정되는 민주적 성격 자체가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국가관료체제를 더 비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 프랑스국가에 대한 토크빌의 분석과 한국의 민주화를 전후로 한 시기 국가권력의 구조변화에서 높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국가와 경제영역에서 재벌의 독점적 지위는, 각각 더 강력해졌다. 시민사회는 운동의 정치화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결과로 더 허약해졌다. 이 과정에서 결사체로서의 노동의 시민권이 배제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중추적 조직 기반이라 할 자율적 결사체의 허약함을 표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둔 채 국가 밖에서 시민운동과 뉴미디어를 앞세우는 것만으로는 사회양극화와 노동소외를 개선하는 데 있어 이렇다 할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모든 제도적 가능성을 소진시키면서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를 완성시킨 유럽에서는, 기존 민주주의의 제도적 경계를 확대하지 않고서는 시민적 참여의 동인을 끌어낼 수 없다. 그와는 달리 신생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적 조건에서는,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제도적 자원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문제’(underutilization)가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더 핵심적인 요인이다. 시민참여의 열정과 에너지는 운동 형태로 또는 포퓰리즘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시민의 의사와 신념, 열정, 에너지들은 분산되고, 간헐적으로 표출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분산된 힘들은 압도적인 정치적 자원과 권력을 갖는 국가의 통제력 안으로, 또는 대기업의 경제적 자원의 수혜 범위 안으로 분자적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뭇 전통적인 민주주의 제도로서 정당을 발전시키고, 국가-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좀 더 대칭적이 되도록 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데 있다. 결국 우리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제도로서 정당의 역할을 강화시켜야 하고, 동시에 현재 서구민주주의 국가에서 탐색되고 있는 시민참여의 새로운 제도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오페와 필자 사이에 문제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이 지점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