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8일 일요일

“매장 점원 따위가…” 서글픈 감정노동자의 하루


이글은 경향신문 2013-04-26일자 기사 '“매장 점원 따위가…” 서글픈 감정노동자의 하루'를 퍼왔습니다.

최근 포스코 그룹의 한 임원이 여객기 안에서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손님을 응대하는 일의 특성상 자신의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의 현실이 주목받고 있다.

감정노동이란 ‘말투나 표정, 몸짓 등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직무의 한 부분으로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노력해야 하는 일’을 뜻하는데, 서비스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손님에게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아도 항상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강요받는 현실은 감정노동자들이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데만 그치지 않고 생산성 저하와 같은 문제까지 불러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동용품 전문매장에서 일하는 차모씨(26)는 ‘진상’ 손님의 지나친 항의를 한 번씩 겪고 나면 몸서리가 쳐진다. 최근엔 “아이 옷을 100만원어치나 사는데 왜 안 말렸냐. 영수증 들고 집으로 와서 다 환불 처리하라”는 손님의 전화에 할 말을 잃었다. 30대로 보이는 부부가 자녀 2명과 함께 매장에 들러 아이들의 옷을 사갈 때만 해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부인이 매장에 전화를 걸어 욕설을 섞어가며 환불을 요구하자 차씨는 전날 그 부인이 시종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애들 엄마가 고른 옷을 남편이 무시하니 표정이 안 좋아지던데, 그 화풀이를 나한테 할 줄은 몰랐다”는 차씨는 “‘못배운 주제에 매장 점원 따위가’라는 말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테러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정신이 빠져 손님의 말을 듣고만 있던 차씨는 전화를 끊은 뒤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9월 콜센터 노동자들이 서울 광화문 KT사옥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차씨의 사례는 비교적 양호한 정도일 수도 있다. 한명숙 의원실이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서비스연맹) 등과 4월 29일 공동으로 개최하는 ‘감정노동의 실태와 개선방향에 대한 긴급토론 회’ 실태조사 자료에는 큰 정신적 충격을 입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거나 알코올 등 약물에 대한 의존이 심해져 일상생활로 복귀하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린 감정노동자들의 사례가 열거돼 있다. 상당수의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의 항의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다시 관리직원의 질책이나 고객만족 도 점수를 낮게 받는 이중의 고통도 겪어야 했다. 또 집으로 돌아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의 가족들에게 화를 내며 푸는 등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어 상처입은 감정이 가정 등 다른 영역으로 전파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감정노동자들이 속한 업종은 백화점·마트 등 유통업, 식당·술집과 같은 외식업, 콜센터를 운용하는 금융업이나 공공부문 등 대인 서비스가 포함된 거의 대부분의 서비스 업종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지난해 국내에서 발표된 학술논문 가운데는 군 장교나 교사 등 비교적 주목받지 않았던 근무영역에서도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각함을 다룬 연구도 있었다. 감정노동은 일부 업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업종에 퍼져 있는 일의 한 형태인 것이다.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의 노동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감정노동이 모욕으로 이어지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돼 있는 현실과 얽혀 있었다. 다른 산업에 비해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임금수준도 낮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노동을 하면서 받는 모욕적인 대우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호텔에서 일하는 곽모씨(27)는 주로 술에 취한 손님을 객실까지 안내하는 과정에서 직업을 비하하는 언사를 수시로 듣게 된다고 말했다. 곽씨는 법조인 등 고위직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일수록 곽씨의 지위를 얄잡아보고 “너희들 놀 때 나는 열심히 공부 해서 이 자리에 올랐다. 아니꼽냐?” 같은 언사로 수모를 줄 때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화를 삭여야 했다고 말했다.

집배원과 같은 남성 중심의 직종과 우편·금융 창구업무 등 여성 중심의 직종이 혼재된 우정사업본부의 경우에도 감정노동으로 인한 피해는 성별을 크게 가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전국 9개 우정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고객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집배원들과 우편창구 직원들은 각각 한 달 평균 4회 이상 고객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했다. 대인 서비스 중심인 우정본부의 업무 특성상 감정노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도 심각해 33%의 직원들이 사회심리 적 고위험군에 들어가는 것으로 분류됐다.

이미 사회 전반에서 이뤄지는 감정노동을 보다 원활히 수행하고 감정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선 보다 개선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 가 높다. 유럽에서는 감정노동이 고령화나 고용불안 문제 등과 함께 미래사회의 10대 심리적 위험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보고, 산업재해 승인 범위를 ‘사고 중심’에서 ‘질병 중심’으로 전환해 기준을 완화하는 추세다. 또 유럽연합은 2000년부터 직장에서 겪는 정신적 괴롭힘이 일종의 차별행위라는 취지에서 처벌방안을 담은 법안을 도입해 시행 중이다. 한국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2011년 감정노동자를 위한가이드 라인을 만들어 노동자와 사업주에게 배포한 바 있지만, 정책권고나 그 이상의 강제성 있는 대책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제도적인 보호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감정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휴식시간을 보장하거나 직장 및 가정생활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하는 등 법적으로 규제할 수 없는 영역의 개선방안이라도 찾을 필요가 있다.

연세대 김왕배 교수는 “일반적으로 근무기간과 주당 근무시간이 길수록 스트레스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감정노동에 노출이 될수록 숙련되어 스트레스가 감소되기보다는 오히려 누적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휴식에 대한 자율성, 일과 가정의 균형 보장을 통해 감정노동자가 감정 부조화를 추스를 수 있는 후방공간을 충분히 제공하고, 고용 안정성을 보장해 감정노동자가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의 감정 표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손님을 응대하는 태도를 상위 관리자가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채점해 인사에 반영하는 등의 기업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정규직 감정노동자라도 직장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도가 높을 경우 감정노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노동에 대한 고용주의 태도 전환이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호서대 한수진 교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감정노동을 비교한 논문에서 “사회정체성이 높은 직원은 조직과 자신이 심리적으로 하나라고 여기게 되며 조직에서의 업무 수행과정에서 정서적 투입을 적극적으로 한다”며 “반대로 사회정체성이 낮은 경우는 감정적 자원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방식으로 감정노동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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