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이시영 편파판정’ 논란 부추긴 무책임한 언론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4-27일자 기사 '‘이시영 편파판정’ 논란 부추긴 무책임한 언론들'를 퍼왔습니다.
[비평]검증 없이 ‘중계’하기 바빴던 언론…두 선수의 상처는 누가 책임지나
‘연예인 복서’ 이시영 선수의 24일 경기를 두고 여전히 ‘편파판정’ 논란이 뜨겁다. 그러나 언론의 ‘상업주의’가 논란을 키웠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사실 확인 없이 의혹을 퍼 나르고, 섣부른 단정과 출처 없는 ‘받아쓰기’로 논란을 부채질했다. 
 
이시영 선수가 제24회 대한아마튜어복싱연맹회장배 전국복싱대회 및 제11회 전국 여자복싱대회에서 승리한 24일 직후, 언론들은 일제히 이시영 선수의 ‘승리 드라마’에 주목했다.  
 
“링에 올라가면 이시영(31·인천시청)은 더 이상 여배우가 아니다. 얼굴에 상처가 나거나 눈가에 멍이 드는 것보다 승리가 더 중요하다.”(중앙일보 25일자 28면)
▲ 중앙일보 4월25일자 28면


“여배우에게 얼굴은 생명과 같다. 그렇지만 그는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굴이 일그러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취미로 시작한 복싱이었지만 그에게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국민일보 25일자 25면)
 
그런데 같은 날, 동아일보는 (패자 김다솜 “KO로 못 이긴 제 잘못이죠”)라는 제목의 칼럼을 29면에 내보냈다. 이종석 기자는 “누가 봐도 김다솜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경기인데 심판은 이시영의 손을 들어줬습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이 기자는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을 지낸 홍수환 씨의 ‘관전평’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홍 씨는 “누가 봐도 (시영이가) 진 경기”라며 “자꾸 이러니까 복싱 팬 다 떨어지는 거야”라고 말했다. ‘편파판정’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이 기자는 곧이어 “왜 이런 판정이 나왔을까요”라고 반문한 뒤, “복싱 흥행 때문입니다. 얼굴 예쁜 여배우가 복싱을 잘해서 국가대표까지 됐다는 영화 같은 얘기, 바닥에 떨어진 복싱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가 있을까요”라는 ‘주장’으로 넘어갔다.
▲ 동아일보 4월25일자 29면


이 기자는 ‘편파판정’을 주장했지만, 근거는 사실상 홍수환 씨의 말이 전부였다. ‘누가 봐도 상대방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의혹에 대한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제시됐어야 하는 대목에서, ‘세계챔피언’이라는 하나의 ‘권위’를 빌려온 셈이다.
 
그는 ‘편파판정’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 뒤 곧바로 “복싱 흥행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졌다고 생각하느냐’에 대해 김다솜 선수가 ‘KO로 못 이긴 제 잘못’이라고 답했다는 사실은 그의 ‘억울함’을 드러내 보일 수는 있지만, ‘편파판정’을 입증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이 기자의 기사가 나온 이후, ‘편파판정’ 논란에도 불이 붙었다. 이날 오전, 이 기사를 리트윗 한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가 ‘타이틀 반납’을 주장하고 나섰고, 점심 즈음에는 “연맹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김다솜 선수의 소속 체육관 최락환 관장의 발언이 연합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유효타만을 인정하는 아마추어 복싱의 채점 룰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연맹 측의 해명에 이어 해당 경기 주심의 반박이 연합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원조 배우 복서’로 알려진 조성규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심판 판정을 비판한 글이 수십 곳의 언론에 소개되기까지는 불과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같은 ‘편파판정 논란’ 속보 경쟁에 이어 이날 오후, 최 관장은 머니투데이와의 통화에서 “아무래도 이씨가 탤런트고 인지도도 있다 보니 '어드밴티지'가 부여돼 판정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막연한 의혹 제기 수준이었지만, 이는 이전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문제제기로 해석돼 또 한 번 언론을 타고 퍼져나갔다. 
 
언론들은 최 관장의 발언을 앞 다투어 옮기는 한편, SNS에서의 반응을 묶어 ‘편파판정 논란’에 불을 지펴댔다. 발언 출처를 밝힌 언론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최 관장이 연맹에 정식으로 항의를 했다’거나 ‘아마추어 경기에서 (김다솜 선수처럼) 오픈블로우로 벌점 받는 경우는 없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언론을 타고 빠르게 확산됐다.
▲ 스포츠한국 4월26일자 10면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25일 저녁, 최 관장은 한국경제TV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판정 관련 어떠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며 ‘최 관장이 연맹에 정식으로 항의했다’는 보도에 대해 ‘오보’라고 말했다. 
 
논란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선, ‘편파판정’ 의혹을 제기하는 주장의 근거와 ‘문제없음’을 강조하는 연맹의 주장을 검증해봐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출처 불명의 ‘말’들의 홍수를 그대로 ‘중계’하는데 열중했다. 
 
언론이 따져봐야 할 대목은 많았다. 언론은 “아마추어 복싱은 파워보다는 정확한 기술에 의한 타격이 중요하다”는 연맹의 해명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건지 따져야 했고, “경기 직후에는 이의 제기를 해봤자 나중에 추하게 될 까봐 하지 않았다”는 최 관장의 설명은 과연 믿을 만한지도 들여다봤어야 했다. 또 2년 전에 이시영 선수를 가르쳤다는 홍수환 씨가 ‘편파판정’을 주장하는 배경에 다른 이유는 없었는지, 언론은 가려내야 했다.
 
수 없이 쏟아지는 기사들 속에서 남은 건 뭘까. ‘이시영’을 키워드로 한 수백 개의 기사가 쏟아졌지만, 결론은 ‘김다솜 선수 측은 판정에 불만을 제기했고, 연맹은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는 것뿐이다. 애초의 문제제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오보’와 ‘베껴 쓰기’의 문제는 뒤에 두더라도, 이시영 선수와 김다솜 선수가 받았을 상처는 과연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의혹이 있다면 이를 검증해야 하는 건 언론의 당연한 책무다. 그러나 지난 이틀 동안 보여준 언론의 태도는 ‘검증’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지난 이틀 동안, 과연 우리가 읽었던 건 뭐였을까.

“이시영 선수가 연예인이다보니까 이슈거리를 만드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론에서 이제 와서 판정에 대해 뒤늦게 떠드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결국 복싱 이미지만 손상될까 걱정된다. 너무 안타까운 일 아니겠나.” (이승배 복싱 국가대표 감독)

허완 기자 | nina@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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