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재벌에 더 이상 관용은 없다, 레알?


이글은 한겨레21 2013-04-29일자 제958호 기사 '재벌에 더 이상 관용은 없다, 레알?'을 퍼왔습니다.
[이슈추적] 한화 김승연 회장은 ‘항소심 실형’ 선고, 싸늘해진 법원 분위기에 SK그룹은 부랴부랴 항소심에서 말바꾸기… 국민에게 ‘경영차질론’은 먹혀들지 않는데 대통령의 재벌에 대한 입장은 오락가락
“피고인 김승연을 징역 3년, 벌금 51억원에 처한다.”
관용은 없었다. 지난 4월15일 항소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하는 판결 주문을 읽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눈을 꼭 감았다. 당뇨와 우울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탓에 이동식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산소호흡기를 꽂고 법정에 나온 그였다.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구속집행정지 기간에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항소심 실형’은 과거 두 번 수감된 적이 있는 그에게도, 재계 상위 재벌 총수들 중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착복은 아니나 업무상 배임”

» 업무상 배임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4월15일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구급차를 타고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당뇨와 우울증 등이 악화된 그는 구속집행이 정지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재판장 윤성원)가 김 회장에게 선고한 형량은 1심(징역 4년, 벌금 51억원)에서보다 1년 감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큰 틀에선 1심과 판단을 같이했다. 여러 횡령 혐의에는 1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무죄, 공정거래법 위반에는 유죄,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에는 일부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그러나 배임 혐의와 관련해선 1심과 판단을 달리한 대목이 더러 있다. 검찰이 기소한 업무상 배임 혐의를 재벌 총수가 할 수 있는 정상적인 경영 판단의 하나로 볼지, 아니면 임무에 어긋나는 위법한 행위로 계열사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볼지에 대한 1·2심 판단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김 회장이 차명으로 소유한 한유통·부평판지·웰롭에 대해 다른 계열사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거나 지급보증을 서게 해서 계열사에 총 8994억원의 손해를 입혔는지 여부다. 핵심 쟁점으로 꼽힌 이 혐의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피고인(김승연)이 계열사 경영진과 공모해 부당 지원을 하도록 해 계열사에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계열사에 아무런 손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피고인이 애초 이들 회사의 열악한 재무구조를 인지한 상태에서 투명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부실 위장 계열사를 대규모로 지원한 것은 계열사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유죄를 선고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가 경영상 정상적 판단으로 인정한 대목도 있다. 그룹 계열사가 부평판지를 인수한 뒤 부실을 해결하도록 해서 해당 계열사에 240억원의 손해를 입혔다는 혐의다. 1심은 일부 유죄로 보고 손실을 82억원으로 산정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계열사에 부실 회사를 인수시키면서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우량 회사를 함께 인수시켰기 때문에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전부 무죄로 판단했다. 이렇게 업무상 배임에 대한 판단이 갈리면서 김 회장에게 인정된 업무상 배임액은 1797억원으로 1심(2869억원)보다 줄어들었다.
한화 쪽에도 성과는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 회장의 사건이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비자금을 조성해 개인적으로 착복한 다른 재벌 총수의 사례와는 다르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엄연히 위법행위를 저지른 만큼 “계열사 내부의 부실을 정리하려는 정상적인 구조조정의 한 과정”이라는 한화 쪽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했다.

한화 쪽 “왜 하필 우리냐” 볼멘소리

오히려 재판부는 재벌 총수의 경영상 판단을 존중해 배임죄를 크게 완화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을 판결문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최근 기업의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경영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배임죄 적용의 무리한 확장을 제한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 사건은 적법한 절차와 수단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런 사안과는 다르다”며 적법하지 않은 경영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한 것이다. 김 회장은 업무상 배임죄 성립 여부에 대해 앞으로 상고심에서 한 번 더 판단을 받게 된다. 만약 상고심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김 회장은 3년을 꼼짝없이 교도소에서 보내야 한다. 상고심에선 유무죄 여부만 다룰 뿐 항소심에서 정해진 형량은 감형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 회장과 한화 쪽이 ‘항소심 실형’을 어느 정도 내다봤다고 하더라도, 이번 판결에 재계가 느끼는 충격파는 크다. 재벌 총수가 실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법정 구속된 데 이어, 항소심에서도 실형이 유지되는 건 국내 재벌사에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140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난해 ‘1심 법정 구속-2심 실형 유지’ 된 첫 사례가 있지만, 재계 50위권 그룹의 오너라는 점에서 김 회장ㅇ 실형이 주는 무게감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동안 재벌 총수들은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도 ‘1심 실형-2심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상고심 뒤 특별사면’으로 번번이 면죄부를 받아왔다. 한결같이 “재벌 총수는 그간 경제발전에 기여했고, 앞으로도 계속 기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600억원대 회삿돈 횡령 등), 최태원 SK그룹 회장(1조5천억원대 분식회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1100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이 착실하게 그 공식을 따랐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100억원대 조세포탈 등)과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289억원 횡령 등) 등은 아예 1심부터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김승연 회장이 항소심에서도 풀려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벌 총수를 징역살이시킨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우리 회사는) 때를 잘 만나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김 회장이 재벌 재판 공식 타파의 상징처럼 된 데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회사 안팎의 분위기가 있다. 지난해 1월 회삿돈으로 고가 미술품 등을 구입한 혐의로 기소된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1심에서 실형을 받고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재벌 총수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비난 여론이 들끓으면서 재벌 총수도 정해진 양형 기준에 따라 처벌하는 분위기로 급전환됐기 때문이다. 그 첫 적용 대상이 이호진 전 회장, 두 번째가 김승연 회장이었다. 그 뒤에는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자가 경제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에 대한 엄벌을 약속하면서 김 회장에 대한 실형은 경제민주화의 상징처럼 비치기까지 했다. 한화 쪽에서 “왜 하필 우리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한 대목이다. 최정표 건국대 교수(경제학)의 지적이다. “위법을 저지르긴 했지만 한화가 억울할 법도 하다. 이미 웬만한 재벌 총수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면죄를 받은 뒤다. 사실 재벌이라고 다 같은 재벌이 아니지 않나. 한화가 삼성그룹처럼 규모가 크고 로비를 잘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국회 출석 불응에 벌금 1500만원 선고도

»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월 13일 1심 선고를 듣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김 회장에 대한 항소심 실형 선고로 비리를 저지른 재벌 총수에 대해 법원의 ‘무관용 원칙’이 다시 확인되자 가장 긴장하는 건 SK그룹이다. 최태원 회장이 지난 1월 말 회삿돈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돼 김 회장의 뒤를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최 회장 변호인단은 법원의 단호한 판단을 예상 못했는지 지난 8일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전략을 180도 바꾸기도 했다.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부회장이 저지른 일일 뿐, 최 회장은 전혀 몰랐다”는 수사 과정에서의 진술을 번복해 “최 회장도 일부 혐의에 관여한 게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재벌 총수가 체면을 구기고 말을 바꿀 만큼 재판 과정이 최 회장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싸늘해진 법원 분위기에 당황하기는 다른 재벌들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이유 없이 국회의 출석 요구에 따르지 않은 혐의로 기소된 정용진(45)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지난 4월18일 벌금 1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재벌에 큰 액수는 아니지만 판결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재판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형사8단독 소병석 판사는 “재벌에 벌금 1500만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범행이 반복된다면 집행유예, 또 반복되면 징역형을 선고하는 형사 원칙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급반전된 법원의 판단과 경제민주화에 대한 여론으로 ‘이중고’를 겪게 된 재벌들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방식은 ‘경영차질론’이다. 총수가 강한 처벌을 받게 되면 대규모 투자나 고용 결정을 못해 기업 경영에 막대한 문제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항소심 판결을 두고 당장 한화 쪽이 “안타깝다. 대규모 투자 계획들은 당분간 늦출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논리다. 지주회사를 담당하는 김동양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김승연·최태원 회장이 1심에서 법정 구속됐을 때가 가장 충격이 컸는데 그때도 각 지주회사의 주가는 하루 정도 출렁인 뒤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계열사마다 전문경영인이 있기 때문에 오너가 없어도 기업의 의사결정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고 시장은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민주화 법안 제동 건 날과 다음날

아예 총수들이 사법부로 가는 일을 만들지 않게 하려는 시도도 있다. 한화 사례처럼 최종 경영 판단을 하는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의 단골 메뉴인 배임죄를 없애거나 완화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4월1일 ‘배임처벌이 기업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다. 기업 292개를 설문조사했더니 배임처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법적용 및 처벌기준 불명확’을 꼽았다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이유로 배임죄 손질을 촉구했다.
한편에선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새 정부와 여론에 밉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여론에 부응해 4월18일 전체 물류·광고 분야 일감의 절반에 해당하는 연 6천억원 규모의 물량을 중소기업에 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한화그룹은 임기 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강조해온 박 대통령의 의지에 발맞춰 지난 3월1일 비정규직 직원 1900명을 정규직으로, 직원 불법 사찰 등으로 논란을 빚은 신세계 이마트는 4월1일 사내하도급 노동자 91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재벌들의 긴장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한 논의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탓이다. 박 대통령의 지난 4월15일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내) 공약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다.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기업의 부당 내부거래(일감 몰아주기) 처벌 규정이 대폭 강화되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새누리당에선 즉각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에 대한 ‘속도조절론’이 대두됐다. 여야가 신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 쌓여 있는 경제민주화 법안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하기 전에 박 대통령에게 발목을 잡힌 셈이다. 최정표 교수의 비판이다.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법안 입법에 제동을 건 날, 대기업에 투자를 늘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다음달 한-미 정상회담을 갈 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주요 재벌 총수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굉장히 상징적이다. 박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재벌을 손보는 대신 손을 잡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얼떨결에 경제민주화의 상징이 돼버린 재벌 총수는 죗값을 치르게 됐지만, 진짜 경제민주화는 언제 시작될지 기약도 없다는 의미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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