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9일 월요일

차별금지법 반대한 보수 기독교, 예수정신 저버린 것

이글은 대자보 2013-04-27일자 기사 '차별금지법 반대한 보수 기독교, 예수정신 저버린 것'을 퍼왔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성서 전체에 흐르는 예수정신을 읽어야

오늘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성소수자 문제를 주제로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발의했던 ‘포괄적 차별금지법’ 법안이 보수 기독교인들의 적극적 반대활동으로 결국 철회되었습니다. 이 일에 앞장서온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를 타락으로부터 구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이 소외되고 억눌린 이웃들의 친구로 사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동성애를 정죄하는 성서의 기록에 대하여
  
동성애를 죄로 보는 성서의 관점은 구약 뿐 아니라 신약에도 나타납니다. 하여 성서의 기록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보수 교회 목회자들이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성애를 금하는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레위기 20장 13절, 공동번역.)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27절, 공동번역.)

성서에 이런 기록들이 있기에,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전통 신앙에 의하면 동성애는 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이 정말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여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 적용해야 할 절대 규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저는 차라리 성서를 버리고 이 문제로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구약폐기론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가치관에 맞지 않으니 차라리 폐기하는 게 낫겠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저 역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으로 성서를 읽지 못하고 문구에 매여 이삼천 년 전 고대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갇혀 산다면 구약 뿐 아니라 신약까지도 폐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또한 우리 신앙과 삶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지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야 하며, 오늘날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기록에 대해서는 매이지 말고 과감히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동성애자를 용납하지 말라는 성서 구절은 성소수자가 겪는 아픔과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고대인의 가치관 아래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사상과 윤리, 의학, 과학 등 모든 면에서 이천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특정 구절과 교리에 여전히 묶여있으면 예수께서 품어주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인권탄압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2. 바울은 자신의 글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증거는 성서 자체에 의해서도 제시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성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고 저주를 선언했던 사도 바울 자신이 그 증인입니다. 다음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의 일부입니다.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25절)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9~31절)

그리고 이것은 내 의견입니다마는 과부는 과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나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40절, 이상 공동번역)

오늘날 사도 바울에 대한 해석은 예수님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대부분 바울이 오늘날 우리가 믿는 정통교리의 초석을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려 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영성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을 보듬어 안으신 예수정신과 그 운동을 계승한 분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교회가 이른바 ‘보수정통’ 신학을 지지하므로 그 입장에 의거해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수 신앙을 갖고 계신 교우님들은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라는 표현대로, 바울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생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나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라는 표현 역시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에 대해 “비록 바울 자신은 자기 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확신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왜냐 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권하는 내용을 보면 그의 생각 자체가 잘못 판단한 오류였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인들이 서로에게 건넨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 이 말은 “주여, 어서 오소서!”라는 뜻으로,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며 그 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옛 질서를 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이니 고난을 참고 기다리자는 상호간 믿음의 격려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오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권면은 그가 당시의 교인들처럼 ‘임박한 종말론’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혼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곧 오시리라고 기대했던 임박한 종말론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확신이 틀린 것으로 역사에 의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마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면 성령의 오류를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이런 예는 성서의 기록을 절대기준으로 삼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성서는 당시 시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토대로 기록되었기에,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저자가 가진 인식과 가치관의 한계도 고스란히 담겨있으므로, 성서의 기록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성서자체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성서의 문구를 넘어 성서 전체에 흐르는 예수정신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4월 14일자 주일편지에서, 불교의 살부살조 정신을 본받아 우리 기독교도 살예살서 정신을 꼭 가져야 한다고 교우님들께 말씀드렸습니다. 과거의 교리와 전통에 매이게 하여 바른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예수님도 죽이고 성서도 넘어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본문조차도 전승자나 기록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전하거나 기록한 것일 수 있기에, 특정 문구에 매이지 말고 성서 전체를 흐르는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의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해석해야 하며, 예수정신에 어긋나면 성서에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매이지 말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모든 종교적 규례와 편견과도 맞서 싸우셨으며,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과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셨습니다. 하여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고 옥죄는 성서의 모든 기록은 오늘날 인류가 도달한 과학과 이성의 빛 아래 검증되어야 합니다. 

교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모든 비합리적이고 배타적인 기록들에 대해 ‘살신살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신앙을, 또한 신약성서에도 여전히 나타나는 한계와 편견, 오류들에 대해서도 ‘살예살서’할 수 있는 열린 신앙을 꼭 가져주십시오. 성서의 문자 안에 갇힌 하나님과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는 참 하나님과 참 예수님을 결코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성서의 문구로부터 자유로워지십시오. 성서의 구절을 절대화하는 성서우상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성서무오설이라는 비합리적인 교리로부터도 벗어나십시오. 성서의 특정 구절이 뭐라고 말하건 보편 상식에 어긋나면 성서 구절이 아니라 상식과 합리를 따라야 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성서의 기록도 마땅히 오늘날에는 재해석해야 합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사회가 타락한다는 생각은 객관적인 탐구나 과학적 통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기록에 대한 맹신과 오래된 관습의 영향으로 형성된 허상입니다. 오히려 다수자와는 다른 소수자의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수의 힘으로 소수자를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타락한 사회의 폭력이며 우리 사회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편견입니다.

동성애 문제는 이성애의 경우와 똑같이 그것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구체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차별 없이 당사자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성적 지향은 개인의 성향에 대한 것이기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문제이지 사회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류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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