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8일 일요일

나의 사랑 나의 병원


이글은 한겨레21 2013-04-29일자 제958호 기사 '나의 사랑 나의 병원'을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 보호자도 갈 곳도 치료비도 없는 이들이 마지막 의탁한 곳, 4개 공공병원 4명의 환자 이야기

경상남도의 ‘진주의료원 해산 시도’를 놓고 전국이 들끓고 있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적자 병원을 없애겠다며 ‘상승’과 ‘추락’ 사이에서 한판 도박을 감행 중이다. ‘강성노조’ 여론몰이를 하던 그가 뜻밖의 역효과에 직면했다. 그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가 대중을 휩싸고 있던 무관심의 자갈밭까지 갈아엎고 말았다.
지방의료원으로 대표되는 한국 공공의료 시스템은 거대 민간 병원의 자본 공세 속에서 늘 스포트라이트 밖에 있었다. 홍 지사의 일방통행은 전 국민의 눈과 귀를 열어 공공의료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존’과 ‘폐’는 한 단어를 이루는 ‘쌍’이다. 폐쇄의 이유는 동시에 존재의 이유와 맞물린다. 진주의료원은 죽음에 직면해서야 생존의 필요성이 조명받는 역설 앞에 놓였다.
진주발 지방의료원 논쟁엔 생략된 목소리가 있다. 환자다. ‘적자 논쟁’은 복잡한 통계와 정연한 언설로 그들의 모습을 지운다. ‘강성노조 딱지 붙이기’ 속에서 전국 공공병원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의 한숨은 묵음으로 처리된다. 공공의료가 어떤 이들에겐 왜 목숨과도 같은지를 ‘책임 공방’ 프레임은 보여주지 않는다.
진주의료원의 운명이 꽃비처럼 스러질 위기에 몰린 4월 셋쨋주. (한겨레21)이 전국 4개 공공의료원을 찾았다. ‘격렬하고 치열한 논쟁’의 틈새에도 끼지 못한 환자들의 ‘담담하고 암담한 이야기’를 만났다. 그들에게 공공의료원은 가족도 외면한 자신을 껴안아준 ‘우리 병원’이었다. _편집자

» 서울시 동부병원에 입원한 한경호(가명·오른쪽)씨가 주치의 이보라 내과 과장(왼쪽)의 진료를 받고 있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다 지난 3월 초에 쓰러진 한씨는 신고받고 출동한 구급대원에게 구조돼 동부병원 응급실로 실려왔다. 폐결핵으로 몸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들 만큼 그의 팔다리는 심하게 야위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서울·인천=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서산·진주=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1. 서울시 동부병원

전화벨이 울렸다.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서울 종로소방서 숭인구급대가 행인의 신고를 접수했다. 3월6일 아침 8시7분이었다. 한국마사회 종로지사 뒤쪽이라고 했다. 구급차는 8시8분 소방서를 출발했다. 봄의 온기가 쉽게 잡히지 않는 아침이었다. 4분 뒤 1km 떨어진 현장(종로 99가길 13)에 도착했다.



“우리 병원의 특징 중 하나가 문병 오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병원 앞에 있는 가게들도 장사가 안 돼요.”- 동부병원 이보라 내과 과장



입원환자 64%가 의료급여 대상자

바짝 마른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남자의 뼈는 수액을 모두 빼앗긴 나뭇가지 같았다. 근처 고시원에 장기 투숙 중인 남자였다. 구급대원들이 8시19분 남자를 태워 출발했다. 힘겹게 말을 잇던 남자가 다시 의식을 잃었다. 구급차는 용두동 ‘서울시 동부병원’으로 향했다. 민간 병원들은 남자를 보고 난색을 표할 게 틀림없었다. 구급대원은 구조기록에 ‘전신 쇠약’이라고 썼다. “노숙인으로 약 한 달 전부터 기력이 많이 떨어졌고 최근 설사를 많이 한다고 함.” 구급차는 8시24분 동부병원에 도착해 남자를 인계했다.
41일 뒤인 4월16일 아침 8시30분. 회진 중인 이보라 내과 과장이 505호 병실을 찾았다.
“잘 주무셨어요?”
남자가 순하게 웃었다. 빨간 잇몸 아래서 까맣게 삭은 이빨이 도드라졌다. 505호는 공공병원인 동부병원이 운영하는 ‘무료 공동 간병인실’이다. 병원에서 인건비를 지원하는 간병인들이 보호자가 없는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가죽만 남은 남자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졌다. 앙상한 얼굴 탓에 실제 나이(51)보다 10년은 늙어 보였다. 한경호(가명)씨는 “조금 살이 붙었다”고 했다. 건강했을 때 그는 키 168cm에 몸무게 68~69kg을 유지했다. 현재는 33.4kg이다. 병원이 밝혀낸 그의 병명은 폐결핵이다. 그는 가끔 허리를 꺾고 내장 깊은 곳에서 뽑아올리는 듯한 기침을 뱉었다. 동부병원은 그가 평생 두 번째 찾은 병원이다.
“1985년 적십자병원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른 이후 병원은 처음이에요. 병원 가는 게 무서웠어요. 치료비가 무서웠고, 큰 병에 걸렸다고 할까봐 더 무서웠어요.”
동부병원은 6층짜리 건물이다. 4층과 5층엔 노숙인과 의료급여 환자가 주로 입원해 있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돌보길 원치 않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우리 병원의 특징 중 하나가 문병 오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병원 앞에 있는 가게들도 장사가 안 돼요.”
이 과장이 말했다. 한씨는 동부병원 환자의 전형이다. “쪽방·여인숙 같은 곳에 혼자 살다 거리로 나가거나, 수급자여도 끼니를 챙겨먹기 힘든 사람들”이 다수다. 1929년 ‘부민병원’으로 설립된 뒤 84년 동안 수많은 ‘한씨들’이 동부병원에 의탁해 지친 몸을 추슬렀다. 지난해 동부병원 외래환자의 32%와 입원환자의 64%가 의료급여(1종+2종) 대상자였다. 이 과장이 현재 담당하는 환자 17명 중에서도 7명이 의료급여 환자다. 주소지가 지구대나 파출소로 돼 있는 행려환자도 3명이다. 동부병원에선 사회복지시설 ‘은평의 마을’ 환자들도 60~70명 치료받고 있다. 응급실 옆엔 목욕실을 갖춘 노숙인용 ‘복지응급실’이 따로 있다. ‘수익성이 낮아’ 민간 병원으로부터 외면받아온 이들에게 공공병원은 의료 혜택의 마지노선이다.



“병원에서 수급자 신청 진행 중”

병원과 역사를 함께하며 의사보다 병원의 어제오늘을 더 잘 아는 환자도 적지 않다. 호흡기장애 1급 석인수(48·가명)씨는 1997년부터 동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동부병원이 2002년 마장동 옛 경찰병원으로 잠시 옮긴 일이나 이듬해 서울의료원에 경영을 위탁한 일 등을 자기 집 족보 읽듯 줄줄 꿰었다.
“지나가다 빈방에 불이 켜진 걸 보면 끄고, 화장실에서 수돗물이 새는 걸 보면 잠급니다. 저희한테 동부병원은 남의 병원이 아니거든요.”
글을 몰랐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씨는 12살 때 중국집 배달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불을 켜고 글을 익히다 “식당 형들에게 두들겨맞고” 공부를 포기했다. 공장과 공사장을 오가며 나이를 먹었다. 어머니·아버지·남동생·누나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지를 놓고 술만 마셨다. 일주일에 2~3번이라도 일이 있길 소망했으나, 일당 6만3천원씩을 손에 쥐는 날은 점점 줄었다. 몇만원을 더 벌 땐 “김치와 밥만 주는” 월세 25만원짜리 고시원에서 살았고, 몇만원을 덜 벌 땐 “국까지 주는” 29만원짜리 고시원에 몸을 뉘었다. 하룻밤 8천원짜리 만화방에 의탁하기도 했다.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 그는 홀로 살며 병을 키웠다.
“너무 아파서 주사라도 한 대 맞으면 낫겠지 하고 고시원 밖으로 나오다가 자빠진 거예요.”
그의 현 주소지는 ‘아는 누나 집’에 이름만 올려둔 ‘가라 주소’다. 치료비 본인부담금이 꽤 나왔다. “주민센터를 통해 치료비 긴급지원을 받았고, 병원에서 수급자 신청도 진행 중”이라고 이 과장이 귀띔했다. 한씨는 “그동안 수급자란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병원의 도움으로 길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일단 살이 조금씩 붙고 있으니까 모든 게 나아지겠죠.”
떠나버린 살이 돌아올 때쯤 그의 떠나버린 희망도 돌아올진 알 수 없다. 그가 긴 기침을 했다.



환자들이 가난해지고 있다

동부병원 환자 수·수익 증감 추이

환자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서울시 동부병원의 진료 환자 수와 수익 증감 추이는 공공의료원의 필요성을 수치로 입증한다. 최근 3개년도 1분기 환자 수를 비교하면, 2011년 4만9538명에서 2012년 4만6950명으로 줄었다가 올해 4만8945명으로 다시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동부병원의 의료 수익은 37억9천만원→34억6천만원→33억8천만원으로 감소했다. 환자 수는 2년 사이 증감을 오간 반면, 수익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동부병원은 환자 1인당 진료비가 줄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처방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긴 해도 정기 진료와 비급여 검사를 미루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김경일 원장은 “민간 병원에 비해 저렴한 진료비조차 부담을 느낄 만큼 환자가 점점 가난해지는 현실을 날마다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동부병원 같은 공공병원은 환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를 진료한다”며 “진주의료원 해산 시도는 환자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있는 안전망까지 없애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2. 인천광역시의료원

최인성(63·가명)씨는 “국가 일을 처리하다가 좀 다쳤다”고 했다. 그의 양쪽 발엔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얼굴을 숙이고 중얼거리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때론 상대가 없는 말이었고, 때론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거듭 물으면 그는 화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 가능한 정보로 구성한 그의 삶은 인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인천에서 일을 다녔으며, 인천에서 다쳤고, 인천광역시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군대 공병대에서 배운 기술로 건설 노무자로 살았다. 잠은 “국가가 마련해 준 거처”에서 잤다. 가족은 없고, 결혼은 하지 않았으며, 연락되는 친지도 없다.



“자가용이 없는 환자는 우리 의료원을 찾아오기 힘듭니다. 환자의 접근성을 고려치 않은 정책 결정은 인천의료원 적자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 인천의료원 조승연 원장



괴사한 ‘아프지 않은’ 다리

그는 “다리도 아프지 않다”고 했다. “부기만 빠지면 걸을 수 있다”고 했고, “껍데기 조금 벗겨진 것만 아물면 된다”고 했다. “치료비는 붕댓값만 내면 된다”고도 했다.
그의 말의 사실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최씨는 지난 2월20일 새벽 인천 중구 송월동 버스정류장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주민의 신고로 현장에 온 경찰에게 그는 무릎 통증을 호소했다. 저체온증을 우려한 경찰은 119구급대에 연락했고, 그는 응급환자로 의료원에 실려왔다. 의료진에겐 “노숙한 지 오래됐고 아내와는 이혼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가 입원 중인 ‘보호자 없는 병실’에선 생선 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의 두 발은 짙은 흙빛으로 썩어 있었다. 무릎 아래 다리도 검게 변해 있었다. 병원이 진단한 그의 병명은 ‘조직 괴사를 동반한 다리 동상과 폐쇄성 혈전혈관염(버거병)’이다.
의료진은 다리 절단이 시급하다고 판단한다. 수차례의 수술 권유를 그는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그는 “수술할 것도 없이 거의 다 나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오랜 노숙 생활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인천의료원(동구 송림동)은 시 유일의 시립병원이다. 1997년 중구 신흥동에서 새 건물을 지어 이사했다. 터는 과거 ‘개건너’(갯벌건너)라고 불리던 갯벌 매립지 빈민촌 자리다. 땅값이 싸다는 이유로 인천시가 낙점했다. 병원 앞뒤로는 크고 작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멀찍이 떨어진 주거지와 병원을 이어주는 건 뿌옇게 먼지 낀 하늘뿐이다.
“자가용이 없는 환자는 우리 의료원을 찾아오기 힘듭니다. 환자의 접근성을 고려치 않은 정책 결정은 인천의료원 적자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조승연 원장이 말했다. 인천의료원 환자의 90%가량이 신흥동 시절부터 내원하던 이들이다. 도시 빈민이 환자의 절반을 차지한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쫓기다 부상당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치료 뒤 추방당하기도 하고, 북한 이탈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받기도 한다.

외국 주재 한국 영사관이 국내로 비행기를 태워 보내는 무연고 환자들도 모두 인천의료원으로 온다. 박상필(70·가명)씨도 지난 3월22일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그는 필리핀에서 금광사업 실패로 파산했다. 심한 다리 통증을 호소하다 “나 죽으면 처리해달라”며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인천의료원 응급실로 실려온 그는 검사 과정에서 만성 신부전증까지 발견됐다. 어렵게 연락한 아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라며 전화를 끊었고, 박씨가 기억하는 유일한 번호의 주인은 통화를 거부했다. 그는 병원에 “내 간을 팔아서 치료비를 내겠다”고까지 했다. 그는 퇴원 뒤 지낼 거처가 가장 걱정이다. 공공의료사업실 사회복지사 여숙명씨는 “직장 다니는 아들 때문에 수급자 신청이 어려울 수도 있다. 퇴원 뒤 갈 곳도 병원에서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한국 영사관이 비행기 태워보내는 사람들

인천의료원은 주민센터를 통해 최인성씨의 가족도 수소문했다. 조카라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그가 병원을 찾아왔을 때 공공의료사업실은 “마지막 기대”를 거뒀다. 조카의 전화번호만 넘겨받은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병원은 중구청에 의뢰해 최씨가 수급권을 얻도록 도왔다. 사회복지기금 후원을 받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여숙명씨는 걱정이 많았다.
“저분은 우리 병원 아니면 치료받을 곳이 없어요. 돌봐줄 곳이 없으니 퇴원시킬 수도 없고요. 본인이 계속 수술을 거부하니 악화되는 병세만 지켜볼 수밖에요.”
최인성씨에게 퇴원 뒤 지낼 곳을 물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창밖 공장들만 바라봤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이제 아는 사람 만나겠죠.”
그의 손엔 작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10여 분 전 한 교회에서 두고 간 전도지였다. 그는 글귀 하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이불 보푸라기를 뜯었다.

» 최태윤(77·충남 서산시 음암면)씨는 지난 4월16일 충남 서산시 석림동 서산의료원 521호 병실에 입원했다. 홀로 사는 최씨는 45년 전 군대에서 겪은 수류탄 사고의 후유증 탓에 평소에도 서산의료원을 자주 찾는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3. 서산의료원


태안 앞바다를 지척에 둔 충남 서산시는 16만 명이 사는 중소도시다. 지난 4월16일 오후 찾은 서산 시내에서 큰 병원 2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내 동쪽 외곽 수석동에 있는 민간 병원인 서산중앙병원과 석림동에 있는 서산의료원이다. 교회에서 운영하던 서산중앙병원은 10년 전 예산에서 서산으로 이전해왔다. 도립병원으로 출발한 공공병원인 서산의료원은 51년 전부터 있었다.
서산 주민들에게는 큰 병원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이 2곳뿐이다. 선택은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이날 서산의료원 521호에서 만난 최태윤(77)씨도 마찬가지다. 충남 서산시 음암면에서 홀로 사는 최씨가 서산의료원에 입원한 건 나흘 전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머리가 핑 돌대유. 밥 먹고 다시 드러누웠는데, 천장이 아주 정신없이 돌았다니까. 아주 죽다 살아났시유.” 그는 겨우 전화를 들어 택시를 불렀다. 그를 태운 택시는 서산의료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를 응급차 삼아 가는 ‘연례행사’

택시를 응급차 삼아 입원하는 건, 최씨에겐 ‘연례행사’다. 1년에 한두 달은 꼭 병원 신세를 지기 때문이다. 연례행사는 젊은 시절 고향으로 돌아온 뒤부터 그랬다. “아이고, 고상(고생) 무지 했시유. 안 다쳤으면 논 한 마지기 했다니께.”
젊을 적에는 나름대로 건강했던 최씨의 인생이 바뀐 건 45년 전 이맘때였다. 경기도 파주 25사단에서 전방철책근무(GOP)를 할 때였다. 제대를 석 달 앞둔 그의 옆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다른 동료 2명과 근무를 나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나서 정신을 잃었어. 그러곤 막 기어서 막 나온 겨. 하도 정신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도 몰러.” 그는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 온몸에 수류탄 파편이 박혔다.
6개월 동안 군에서 했던 투병 생활은 말 그대로 ‘떠돌이 병상’ 생활이었다. 서울 보훈병원에 있다가, 대전을 거쳐 대구·부산 보훈병원으로 옮겨졌다. “죽으면 죽었지 더는 (병원에) 못 간다고 했지.” 그는 사고가 난 지 6개월 만에 제대했다. 그리고 국가보훈 대상자가 됐다.
몸도 성치 않아 30살 이후로는 농사를 못 지었다. 서산 지곡지구에 있던 광산, 버섯공장, 중학교에서 경비로 일을 했다. 최씨의 생계는 매달 100만원 남짓 받는 보훈수당으로 생계를 꾸린다. 가족이 없는 그에게는 각종 치료비가 가장 큰 지출이다. “가족이 없어서 침대에서도 겨우 일어나유. 형이 둘 있었는데 이제 다 죽고 없시유.” 그의 몸에는 여전히 파편이 남아 있다.
“겨울에는 자꾸 아파. 아프면 또 병원에 오고. 일할 때는 다리가 막 사정없이 떨리는 게…. 머리도 어지럽고 팔다리가 저리고. 몸속에 파편이 아직도 4개나 남아 있대.” 지난해 11월에는 수술한 무릎이 다 아물지 않았는데 발을 헛디뎌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겪었다. 그때마다 그는 동네 병원인 서산의료원에 가는 택시를 부른다.
최씨처럼 서산의료원을 찾는 이들은 태안·당진에도 있다. 1989년 시 외곽으로 이전한 서산의료원에는 현재 205개 공공병상이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생활보호대상자, 보훈대상자, 고엽제 환자 등이 찾는다. 공단이 있어서 산재 환자도 많다. 충남 지역에는 서산·공주·홍성·천안 등에 의료원이 있지만, 지역마다 그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천안처럼 팽창하는 도시에는 기초수급자를 위한 시설이 더 필요하지만, 고령화 도시인 서산에는 최씨처럼 의지할 곳이 필요한 노년층 환자가 대부분이다. 최근 충남도의회는 진주의료원 사태 등을 보면서 도내 4개 의료원의 통합 운영 방안을 검토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 환자가 미수금이 너무 많아 집까지 돈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집에는 하반신 마비 할아버지와 병수발을 드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걸 보고 쌀과 내복을 사드리고 왔다.”- 서산의료원 원무과 직원



“너무 아프기만 해서 미안하죠”

그러다보니 큰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날 만난 의료원 원무과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다. 그는 “한 환자가 미수금이 너무 많아 집까지 돈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는 하반신 마비 할아버지와 병수발을 드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미수금을 받으러 오라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쌀과 내복을 사드리고 왔다”고 했다.
최씨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환자다. 그는 예전에 개인병원도 다녀봤다. “개인병원은 돈만 자꾸 없어져유. 처음에는 6천원, 그다음에는 약값 1500원 이렇게. 자주 가니 약값도 한두 푼이 아니지.” 그가 의료원에서 위안을 얻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족처럼 기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너무 아파서 맨날 언능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시유. 그런데 여기 간호사들은 잘해주고 편하게 해주고 그래유. 맨날 입원만 하는데 너무 아프기만 해서 미안하죠.”

» 진주의료원 해산 조례안의 본회의 상정이 예고됐던 지난 4월18일, 경찰버스가 경남 창원시 사림동 경남도의회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4. 진주의료원

“오늘 낮에 여기 할머니가 나가셨어요. 5층 마지막 환자예요. 할머니 나가시는 거 보고 다들 울었죠.”
지난 4월16일 밤, 서수경 외래 수간호사가 경남 진주시 중안동 진주의료원 5102호의 텅 빈 병실의 불을 켜며 말했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5병동에는 산소호흡기를 낀 채 왕일순(80)씨가 누워 홀로 병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멈춰버린 진주의료원 사태의 여파는 왕씨도 피해갈 수 없었다.
경남 산청군에 사는 왕씨는 20년 전부터 당뇨·고혈압 약을 먹었다.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찾아온 건 지난해 9월이다. 뇌내출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그는 구급차에 실려 경상대학교 부속병원 응급실로 왔다. 늘 약 처방전을 받던 익숙한 병원이었다. 보름 넘게 입원했지만, 머리 속에 고인 피는 없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주치의는 그의 가족에게 “다른 곳으로 옮기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회복이 어려운 긴 투병 생활의 시작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왕씨는 병원비 부담이 적은 진주의료원으로 왔다. 그나마 살림이 나아 병원비를 내고 있는 첫째아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입원비 등이 저렴한 의료원을 선택했다. 그러나 투병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진주의료원에 머문 지 넉 달 만에 경남도가 의료원 문을 닫는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자식 뒷조사해서 전원 독촉, 말이 됩니꺼”

폐업 계획은 둘째아들 박광희(57·목사)씨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도지사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의료원을 닫으라 하냐”며 그는 진주의료원에 남은 환자 보호자를 모아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진주의료원 노조원들과 함께 집회도 나가고, 폐업의 적절성을 묻는 토론회에도 나섰다. 병수발은 다른 가족 몫이 됐다.
그러나 휴업은 진행되고 환자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병원이 문을 닫으니 떠나라는 경남도의 종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전화가 계속 왔죠. 한번은 우리 집이 있는 경남 하동시 진교읍까지 경남도 공무원이 찾아왔어요. 하동군 보건소장을 데리고요. 어머니를 전원(轉院)시켜야 한다고 설득하려고요.”
어머니가 살던 동네 보건진료소에는 “둘째아들과는 얘기가 안 통하니 다른 가족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전화가 왔다는 말도 전해들었다.
“도에서 전 행정력을 동원해 자식 뒷조사나 해서 전원을 독촉한다는 게 말이 됩니꺼. 우리 어머니 옆 병상에 계시던 할머니는 그러대요. 여기 계속 있고픈데 더러워서 내 나가야겠다꼬.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말도 못하고 말이죠….”
왕씨 가족은 두 달 가까이 진주의료원에서 버텨왔다. 그러나 의사가 떠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 4월11일 신경정신과 담당 의사가 병원을 떠났다. 폐업 조치로 4월20일 계약이 끝나는데, 남은 연차를 써야 해서 열흘 일찍 떠난 것이다. 새 담당 의사는 마취과 공보의였다. 박씨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한 다른 가족들은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5군데 병원을 알아보다가 왕씨를 받아주겠다는 진주시 망경동의 목화노인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병원을 옮긴 지 이틀이 채 안 된 지난 4월18일 아침, 왕 씨는 숨을 거뒀다. 이날 오후 그의 빈소가 진주의료원 옆 진주전문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곳에서 만난 박씨는 병원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고 했다. “진주의료원 담당 과장이 그만두기 전에 ‘전원 조치를 하면 스트레스로 급격하게 상황이 안 좋을 수도 있겠다’고 했고, 수간호사도 환자를 옮기면 하루이틀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지난 4월8일 병실에 찾아온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도 비슷한 말을 한 사실을 그는 기억했다.

» 뇌내출혈로 쓰러진 왕일순(80)씨는 입원해 있던 진주의료원을 지난 4월16일 나왔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진 왕씨는 이틀이 채 안 된 지난 4월18일 아침 숨을 거뒀다. 진주의료원 옆 진주전문장례식장에 차려진 왕씨의 빈소. 한겨레 정용일 기자



“진주의료원에 있을 때 어머니는 맥박·산소포화도·혈압 모두 정상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치료받을 의사도 없고, 또 5층 병동에 우리 가족만 남았어요. 병원에 미안하기도 하고, 게다가 전원하라는 압력도 계속 있었고.” -고 왕일순 씨 유족 박광희씨



경남도 “불순… 왜곡… 허위 사실” 으름장

박씨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7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계셔서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가족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며 애써 무덤덤해했다. “진주의료원에 있을 때 어머니는 맥박·산소포화도·혈압 모두 정상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치료받을 의사도 없고, 또 5층 병동에 우리 가족만 남았어요. 병원에 미안하기도 하고 보호자가 와서 매일 어머니와 함께 자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죠. 게다가 전원하라는 압력도 계속 있었고.”
그는 두 달 전 문득 어머니가 의식을 잠시 찾았던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어무이~ 내가 누군지 알겠소?’ 하니 ‘아, 우리 아들 광희~’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래서 계속 흔들어 깨우면서 물었죠. ‘누구? 누구?’ 그렇게요.”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
경남도의회에서 진주의료원 폐업 조례안 처리로 갈등을 빚던 날, 왕씨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자 경남도는 이런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뿌렸다.
“왕일순 할머니의 사망은 진주의료원 휴업 조치와는 무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한 일부의 세력들이 불순한 의도로 마치 의료원의 퇴원 종용과 강제 전원 조치로 인해 돌아가신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광범위하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범죄행위다. 우리 도는 이 시간 이후 왕일순 할머니의 사망과 관련하여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사법 조치를 취할 것이며,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비슷한 시간, 박권범 진주의료원장 대행은 빈소를 찾는 대신 목화노인병원으로 찾아가 왕씨의 진료 기록을 확인했다. 믿고 의지했던 병원을 떠난 왕씨의 마지막 길을 향해 그들은 그렇게 답했다.



“의료원은 내 집이야, 내 집”

진주의료원 ‘터줏대감’ 윤정부 할아버지



“아이고, 말도 마소. 의료원은 내 집이야, 내 집.” 진주의료원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는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울먹였다.
만성폐쇄성 폐질환을 앓고 있는 윤정부(73·경남 진주시 지수면) 할아버지는 늘 코에 긴 호스를 꽂고 지낸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도 힘들다. 숨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40년 가까이 입·퇴원을 해온 진주의료원에서 몇 안 되는 ‘터줏대감’이었다. 숨이 차오르면 병원에 입원해 열흘~두세 달 치료받는 일상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10일 병이 악화돼 진주의료원에 입원한 그는, 진주의료원의 휴업 절차로 인해 4월 초 경남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 사천중앙병원로 옮겨졌다.
그가 진주의료원을 집처럼 오가게 된 건, 21살 시절 늑막염 치료를 잘못하면서부터다. 병원을 가지 않고 집에서 무자격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부작용으로 평생 폐질환을 겪고 있다. 건강 탓에 변변한 일을 할 수 없던 그는 가족도 없어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됐다. 몸이 불편해 당장 밥 먹고 치료받는 것조차 힘들다. 진주의료원에 머문 시간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윤씨는 병원을 나갈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돼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을 찾아야 했다. “홍준표 도지사가 오면 내가 밟혀서라도 여기 있겠다고 했소. 병이 심해져 갈 만한 병원도 없는데 간병인이 소개를 해줘서 여기 왔어. 도에서 그렇게 쫓아내면 어떡해. 사람들 약이 바짝 올라 있는데.”
홀로 사는 그에게 진주의료원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내가 예전에는 너무 아파서 몇 번을 죽으려고도 했소.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 의료원에 있는 게 그나마 더 견딜 만해.” 그 때문에 진주의료원을 없앤다는 홍 지사의 말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의료원에 아파 누워 있으면서도 그리 찍었는데 이리 할 줄 알았나. 손대지 말았어야 하는데 손을 댄 기라.”





“도지사가 집으로 전화도 했어, 나가라고”

열흘 전 병원 옮긴 박창순 할머니


“병원 나가면서 간병인이고 간호사고 죄다 울었어. 무슨 초상집 난 것처럼. 택시기사가 ‘할머니, 와 울어요?’ 하길래, 너무 서러워서 운다고 했어. 병나서 여기 왔는데 고치지도 못하고 오라가라 하니 너무 서러워서.”
지난 4월17일 경남 진주시 판문동 엠마우스병원 노인요양병동에서 만난 박창순(83·경남 진주시 이현동)씨는 열흘 전 이곳에 왔다.
진주의료원에서 1년6개월 가까이 지내다 휴업 조치가 내려진 뒤 강제 전원(轉院)을 당했기 때문이다. 3년 전 겨울, 갑자기 뇌경색을 얻은 박씨는 경상대학교 부속병원 등 2곳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건강보험 진료비가 낮아져 수익이 줄어들자 병원 쪽에서 퇴원을 종용해 진주의료원으로 왔다.
남편과 단둘이 생활하는 그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게 주는 장애수당 등으로 매달 치료비를 70만원씩 냈다. “진주의료원도 안 싸. 정부 병원이라 해도 별로 안 싸대.” 상대적으로 싼 진주의료원 입원비도 부담스러운 형편이다.
박씨가 자발적으로 진주의료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경남도 공무원에게서 “진주의료원이 휴업으로 문을 닫으니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는 전화를 계속 받아왔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내가 우리 병실에서 제일 늦게 나갔어. 그전에는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어. 우리가 안 가고 계속 있으니까 자꾸 전화하더라고. 도지사가 직접 우리 집으로 전화도 했어. 그래서 우린 ‘지금 돈도 없고 갈 집도 없고 병원 갈 돈도 없다’ 했지. 그랬더니 여기(엠마우스병원) 304호실에 해놨다며 오라고 전화가 왔더라고.”
박씨는 “병원이 살림을 못해 문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병원에다 인제 머 하는교? 아파트 들어서는교? 그래도 이름난 병원이고 오래됐는데 진주에서는 그게 있어야 안 하나?”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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