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시사IN 2012-11-12일자 기사 '삶의 주인공을 꿈꿨던 한 장애인의 죽음'을 퍼왔습니다.
10월26일 장애인 활동가 김주영씨가 화재로 숨졌다. 소방서에 전화를 했지만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시민단체는 ‘활동보조 24시간 보장’만 실현됐어도 그녀가 살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본다.
10월26일 새벽 5시께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김주영씨 부모님 맞으시죠? 잠깐 일이 있으니 성동경찰서로 와 주시죠.” 전화를 받은 김씨의 아버지 김성남씨(가명)는 아내 박숙자씨(가명)를 깨웠다. 허겁지겁 옷을 차려 입은 두 사람은 황급히 차를 몰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겹쳤지만, 딸의 숨이 멎었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김주영씨(33)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연립주택 1층에서 혼자 생활했다.
10월26일 새벽 2시께. 방에 누워 있던 김씨는 부엌에서 불이 난 것을 알아차렸다. 119에 다급하게 신고했다. 터치펜을 입에 물고 스마트폰으로 건 전화였다. 소방관들은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불은 9분 만에 꺼졌다. 하지만 김씨의 집은 시커멓게 타버렸다. 그녀는 누워 있던 그대로 숨졌다.

ⓒ김흥구 10월30일 고 김주영씨 노제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그녀의 죽음은 장애인 정책을 수정하라고 웅변한다.
김씨는 1979년 6월14일,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목만 가눌 수 있는 정도였다.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씻고 밥을 먹고 용변 처리를 했다. 전동휠체어는 그녀의 발을 대신했다. 혼자서는 휠체어에 탈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활동보조인은 퇴근하기 직전 늘 그녀를 잠자리에 누이고, 머리맡에 휴대전화와 터치펜, 현관문을 열고 잠글 수 있는 리모컨을 두었다. 불이 나자 신고를 하고, 현관문을 열어둔 것이 김씨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등 시민단체는 ‘장애해방운동가 고 김주영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10월30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을 출발한 운구차는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장례는 노제로 치러졌다. 영정 앞에 국화가 쌓였다. 사진 속에서 김씨는 웃었다. 박김영희 장애해방열사단 대표는 “주영이가 외치던 ‘활동보조 24시간 보장…’ 결국 이게 실현되지 않아 이렇게 가는구나…”라고 비탄했다. 김씨는 하얀 가루가 되어 경기도 광명시립납골당의 작은 그릇에 담겼다.
어릴 적부터 공부 욕심 많아
3월부터 호흡을 맞춘 활동보조인 신미미씨(22)는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함께했다. 10월25일, 이날은 특별했다. 오후 4시께 이들은 왕십리역에서 만나 분당선을 타고 서울숲으로 향했다. 산책하던 김씨는 그날 오전에 생긴 기쁜 소식을 신씨에게 전했다. “새 직장에 11월1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일터와 가까운 데 이사할 집도 봤고. 내일 계약하고 싶은데, 화장실이 좁아서 네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네. 아, 오전 활동보조인도 구했어.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

ⓒ김흥구 김주영씨의 어릴 적 사진과 최근 사진(위). 그녀는 “너무 고생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씨에게 경사가 겹치는 듯했다. 닷새 후에는 남자 친구 서인수씨(가명·36)와 사귄 지 100일되는 날이었다(결국, 이날은 김씨의 발인일이 되어버렸다). 1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서씨도 장애가 있다. 서울숲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형마트에 들러 남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스킨로션, 지갑, 벨트, 바지와 신발….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지갑을 고른 김씨는 들떠 있었다. 오후 9시30분께 집으로 돌아왔다. 잠잘 채비를 마친 후 신씨는 김씨의 집을 나섰다.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로부터 2시간여 뒤인 새벽 1시께 김씨는 남자 친구 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곤하지? 힘들겠네….” 통화는 간단했다. 일하는 중이던 서씨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여느 때라면, 김씨가 수십 분 이내에 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날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 일로 전화가 없네…’ 김씨와의 마지막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김씨는 ‘너무 고생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전하는 화물차에 타고 ‘서울 소풍’ 가던 때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김씨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김씨가 여섯 살이 되던 무렵,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 김씨는 17일 동안 화물차에서 잠을 청하며 김씨를 간병했다. 그 뒤, 가족은 김씨의 치료를 위해 수도권으로 이사했다. ‘엄마가 덮어주는 이불이 제일 따뜻해.’ 성인이 된 뒤에도 김씨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제공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는 김주영씨(오른쪽).
하지만 장애를 가진 이들은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김씨도 그랬다. 한 달여 전, 조카의 돌잔치. 하지만 가지 않았다. 부모의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두 동생과 함께 만들고,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 홀로 가서 아버지에게 드릴 MP3 플레이어를 구입해 선물하는 등 가족 사랑이 지극하던 김씨였다. 남자 친구 서씨는 그녀가 조카 돌잔치에 가지 않는 것이 뜻밖이었다. 김씨는 “여러 사람이 오는 복잡한 자리라,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라고 털어놓았다. 짐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결혼에 대해서도 신중했다.
김씨는 공부에 욕심이 많았다. 여섯 살 때부터 삼육재활원에서 생활한 김씨는 장애인 학교인 삼육재활학교에 진학했다. 10여 명 학생 가운데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당시 김씨의 초등부 담임은 “장애가 심했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라고 손을 들며 항상 먼저 발표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고등부를 졸업한 뒤 같은 재단 직업학교에서 정보처리사 2년 과정을 거쳤다. 또 전남 담양에 내려가 덕산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사무자동화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공부에 시간을 투자했다. 2007년, 한양사이버대학에 편입해 전자계산학을 전공했다. 2011년에도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위해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김씨는 최근까지도 기말고사를 대비한 사회복지 공부 모임을 해왔다.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도 취업은 쉽지 않았다. 2004년, 이력서를 냈지만 답신이 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문화센터에 첫발을 내디뎠다. 미디어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어려서부터 영상이 좋았다. 집에서, 병원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왔던 터다. 두 달여에 걸쳐 다큐멘터리 을 완성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가 기획·촬영·편집을 도맡아 내놓은 11분54초짜리 영상에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담겼다.
집이 있는 경기도 광명에서, 미디어 수업이 있는 서울 광화문 미디액트까지 가는 것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어렵게 도착해도, 조작법이 세밀한 카메라를 직접 만질 수 없었다. ‘내가 찍고 싶은데….’ 6㎜ 카메라를 휠체어에 달았다. 이렇게 찍힌 화면이, 김씨가 보는 세상이었다. 그 사이, 1시간 분량 테이프 6개가 쌓였다.

김주영씨는 생전에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그는 에서 ‘나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어렸을 때 사진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김씨가, 촬영을 마치고 난 뒤, 한 인터뷰에서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자”라고 말한다. 사회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외출 혹은 탈출)을 완성한 다음 해인 2005년, KBS (열린채널)을 통해 전파를 타고, 제5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 ‘젊은이 및 일반’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감독’이 된 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장애인 관련 방송 모니터링을 맡았다. 매주 20시간 근무, 월급 30만원. 자신의 힘으로 처음 번 돈이었다. 2006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시민방송 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독립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프로그램을 김씨와 함께 진행한 박김영희씨는 김씨에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고 독려했다. 김씨도 부모님이 연로해졌을 때 내가 짐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던 터였다. 새로운 둥지를 틀기로 결심했다. 종로구 혜화동에서 자립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하면서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로, 활동보조인 제도를 꼽았다. 하지만 활동보조인 비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항상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삶의 주인공 되기 위해 자립 결심
2009년, 자립에 용기를 얻은 김씨는 광주로 내려가 광주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했다. ‘열악한 현장’에서 활동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10여 개월 동안 중증장애인 2∼3명과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모임을 꾸렸다. 김씨가 쓴 감상평은 인터넷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생활도 잠시. 2009년 10월, 활동보조인을 구하지 못해 일을 포기했다. 부모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흥구 강동역에 전시된 김씨의 그림을 한 장애인이 보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사회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2년9개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센터)에서 일했다. 이때, 사고가 난 행당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센터에서는 장애인 회원 모임을 담당했다. 보치아 게임(장애인 스포츠)과 영화 모임, 글쓰기 모임을 맡았다. 또 선거 기간에는 장애인 참정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지난 4·11 총선 당시, 투표소 접근이 어려웠다. 직접 선관위에 시정을 요구했다. 올 대선도 기다리던 참이었다. 장애인 투표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살펴보자며, 동료들에게 의지를 전하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수채화를 배웠다. 입으로 붓을 물었다. 일을 그만두고는 매주 한 번씩 유화를 배웠다. 미술 선생이었던 김준우씨는 “다른 장애인과 달리 주영씨는 스스로 물감을 섞었다. 달라진 색을 보며 감탄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생전에 완성한 작품은 11월1∼2일, 강동역에 전시됐다.
김씨는 가장 행복했던 일로 지난 7월, 계곡물에 몸을 담근 일을 꼽았다. 샤워를 할 때마다 활동보조인 신씨에게 “나는 물이 좋아. 물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라고 말하곤 했던 터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센터 동료들과 도봉산에 오른 날, 동료들과 등산객 8명이 김씨의 휠체어를 들었다. 이들은 계곡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씨는 33년 만에 계곡물을 만지고, 몸을 담갔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격에 대해 신씨에게 말하곤 했다.
2011년 말, 센터의 글 모임 주제는 ‘나의 장례식에 와준 친구들에게’였다. 김씨는 동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너희에게 짐처럼 느껴졌을까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너희를 두고 떠나는 지금, 너희에게 잘해준 일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잘해주지 못한 일들만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평생 나침반이 되어준 나의 친구, 사랑한다고 말 한번 못했네….” 그로부터 11개월여 후인 10월26일 새벽 2시,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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