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3-14일자 기사 '"1000명 이주민 가운데 280명 줄줄이 사망"'을 퍼왔습니다.
[기고] 원전사고 2년, 日후쿠시마 피해자가 체르노빌에서 찾은 진실 (하)
2년 전 후쿠시마 원전사고 피해자들이 일본의 ‘미래’를 찾기 위해 1986년 원전폭발사고가 있었던 우르라이나 체르노빌을 찾아 원전사고의 심각성을 취재했다. 이 내용은 지난 10일 OBS에서 < 0.23 μSV - 후쿠시마의 미래 >라는 이름으로 방영됐다. 해당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이홍기PD는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을 오가며 현장을 담았다. 미디어오늘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2년을 맞아 2번에 걸쳐 그의 취재기를 싣는다.
조사팀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도착해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우크라이나 국립 암 연구소 소아과 병원이었다. 이 병동엔 암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많다. 무슨 이유로 이 어린 아이들이 암을 앓고 있을까? 혹시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후유증은 아닌지, 피폭당한 부모 때문에 생긴 유전은 아닌지, 조사팀은 그 점이 가장 염려스럽고 궁금했다.
부모들이 당한 원전사고가 아이들한테까지 대물림 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병원의 원장인 크림시크 박사는 조사팀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솔직하게 고백해 주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건강 추적 조사 체계는 어떻게 되어있고 그것으로 질병이 발견되기도 하나요?”(후쿠시마 피해자 시바타씨)
“저는 그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방사능 오염단계에 관한 자료의 대부분이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덧붙이자면,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인구가 대거 이동하면서 잠재적 환자나 이미 발병한 환자들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퍼졌습니다. 때문에 통계나 측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크림시크 박사)

쁘리퍄티유원지 놀이기구
원전사고 후유증은 피폭 여부를 증명하는 것도 힘들고, 다음 세대까지 오랜 시간동안 역학 조사를 하는 것도 힘들다. 때문에 후유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누구도 그 전모를 완벽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일행은 그런 점이 가장 두렵고 불안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원전 사고 이후 백혈병 발병률이 증가했다고 확인된 사실 외에도 체르노빌 피해자에게서 발병한 백혈병이 더 악성임을 발견했습니다. 매우 공격적이기 때문에 치료하기도 어렵습니다.”(클레멘코 세르게이 박사, 국립의학 아카데미 방사선 의학 연구 센터)
2005년 UN보고서에 의하면 체르노빌사고 때 피해를 입고 갑상선암으로 숨진 사람은 9,300명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아동인구에서 갑상선 암 발병사례가 증가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고당시 쁘리뺘뜨 지역에서 대피 했던 성인에게서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죠. 이는 사고초기에 사고가 난 원자로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방사능 노출량이 눈에 띄게 높았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바지카 드미트리 박사, 국립 의학 아카데미 방사선 의학 연구센터)
후쿠시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이번 조사의 핵심 과제였다. 조사팀은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하게 태아의 방사능 피해를 연구하고 있는 콘스탄틴 박사(국립 의학 아카데미 방사선 의학 연구센터)를 만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는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콘스탄틴 박사는 체르노빌 사고 때 피폭당한 아이들이 20대가 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왼쪽 뇌의 손상으로 아이큐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것은 선천적인 저능아라는 뜻이 아니라 좌우 뇌의 부조화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좌뇌의 역할에 해당하는 수학과 언어능력이 정상인보다는 현저하게 뒤떨어지죠. 또한 우리 연구에 의하면 방사능에 노출 된 아이들이 감정적으로나 행동적으로 더 큰 장애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침착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불안 증세에다 집중력도 떨어져 산만해진다는 뜻입니다.”

쁘리퍄티유원지멘홀뚜껑위 방사선 최악수치
조사단이 탄 버스는 키에프를 출발해 북쪽을 향해 달렸다. 버스 안엔 긴장감이 흘렸다. 아주 위험한 곳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30km, 10km 떨어진 곳 두 군데에 검문소가 있었다. 경찰과 군 당국의 삼엄한 경비가 눈에 띠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사전 허가를 받았지만 통과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내부 사정이 어째서 이럴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하자 반경 30km 안에 있던 200여 마을에서 13만 5000명이 강제 이주 당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꺼라 믿었던 고향은 2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거주 금지 구역으로 되어있었다. 당시 이주지에 정착하지 못했던 고령자들 약 1,200명은 고향인 마을에서 숨어 지냈고 지금도 약 10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오염된 목조 가옥들은 흉물스럽게 쓰러져 갔고, 유치원건물에서는 두고 간 인형들과 낮잠을 재우던 침대 등이 있었다. 당시 다급하게 떠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문소를 통과한지 20분 뒤, 조사단 손에 들려있던 측정기가 경보음을 다급하게 울렸다. 방사능이 높다는 소리였다.
20세기 말에 발생한 대 재앙의 진원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재촉했다는 역사의 현장,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던 체르노빌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쿠시마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캐고 싶어 체르노빌을 찾아온 사람들이지만 두려워하면서도 결연했다.
26년 전 폭발했던 문제의 4호기 내부엔 아직도 250톤의 방사능 물질 남아 보이지 않는 죽음의 연기를 끝없이 내뿜고 있었다. 당시 화재 진압과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30대의 군용 헬기가 동원 됐다. 소방관을 포함한 1,100명이 보호 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방사능 더미 속으로 뛰어 들었다. 무모하기 짝 없는 진압 작전이었다. 56명의 소방관이 엄청난 피폭으로 사망했다.
“저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헬기의 모니터를 보고 있을 때 수백 수천 단위의 방사능 수치가 측정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난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삶에서 그 기간은 전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마카랭코 발레리 당시 우크라이나TV 기자)
조사단은 의사가운, 위생모, 고무덧신을 착용하고 원전의 심장부인 중앙제어실로 향했다. 좁고 어두운 복도가 수백 미터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시작된 비극의 현장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외국인에겐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했다. 한참 후에야 2호기 제어실이 나타났다. 똑바로 더 가면 3호기 제어실이 있고 더 앞으로 가면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그 곳이 바로 석관으로 뒤덮인 4호기다.
엄격히 봉쇄된 2호기 제어실 내부로 들어가자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었다. 모든 장비가 26년 전 그대로였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조사단이 가지고 들어간 선량계가 1.23 마이크로시버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평상시의 20배가 넘는 수치이며, 후쿠시마원전 사고 직후 후쿠시마현, 가와마타쵸, 미나미소마시, 가와우치마을 일부 지역의 방사능량과 비슷했다.
사고 당시 연쇄폭발 할 수도 있었던 2호기는 1991년부터 가동이 중지됐고 우크라이나는 소련연방에서 독립해 체르노빌 원전의 가동을 순차적으로 중지했다. 제어실 팀장인 알렉산드씨는 현제 2호기 해체작업에 참가하고 있다. 원전사고 이전부터 근무한 베테랑이지만 언제나 방사능의 위험 속에서 일한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원전을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 말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사쿠라다 아오모리 거주)
“그 문제는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있는 문제입니다. 실질적으로 현재까지 그 어느 나라에도 완벽한 제어시스템은 없습니다. 우라늄을 추출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서 안전한 폐기물을 얻는다는 그런 기술은 아직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알렉산드 제어실 팀장)

우크라이나암센터 소아과병동에 입원중인 남아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4호기로 향했다. 석관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섰다. 다시 한 번 충격 속에서 떨어야 했다. 선량계가 13.0마이크로시버트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쵠악의 수치였다.노후 된 석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셀터 건설현장이 바로 옆에 보였다. 새로운 셀터는 돔 형태로 폭 257.44m 길이 150m 높이 103.89m이다. 골칫덩이였던 4호기는 2015년까지 이 거대한 덮개로 완전히 밀봉된다. 석관 내부의 핵연료나 방사능 물질을 어떻게 추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그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고 한다. 덮개의 수명 또한 100년. 그 후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3km 떨어진 ‘프리퍄티’ 지역. 26년 전만 해도 이 지역은 구소련이 꿈꾸던 첨단 도시였다. 그러나 번창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특급 호텔과 화려했던 공연장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인구 5만 명의 도시가 유령처럼 사라졌을까? 프리퍄티는 소련이 만든 가장 쾌적하고 안전한 계획 도시였다. 젊고 유능한 엔지니어들이 체르노빌로 출퇴근했다. 하지만 원전 사고 이틀 후, 주민들은 1,200대의 버스에 실려 강제이주 당했다. 그게 이 도시의 끝이었다.
키예프에서 남동쪽으로 60km 지점에 있는 코바린 마을. 이 지역은 원전사고가 난지 6년 후. 피폭지역에 살던 주민 1,000명이 집단이주한 곳이다. 정부는 200평의 땅과 집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미하일 씨는 여기로 이사 오기 전까지 농사가 뭔지 거의 몰랐다. 그는 수학교사였고 부인은 협동농장 회계담당이었다.
부부는 원전 사고 때 피폭 당했다. 부인은 86년 12월에 갑상선 수술과 섬유근종 수술을 거푸 받았고 남편은 지금도 94년부터 심근경색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의 딸도 선유근종에 걸렸다. 게다가 손녀도 갑상선종이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죽음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이사 온 동네. 하지만 뜻밖의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무엇보다 원주민들의 텃세가 심했다. 오염지역 출신들은 위험하다며 가까이 하길 꺼렸다며 미하일 씨는 눈물을 흘렸다.이주한지 얼마 후부턴 수많은 이웃이 죽기 시작했다. 부부는 죽음의 공포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사정은 끔찍했다. 1,000 명의 이주민 가운데 280명이 줄줄이 사망했다. 의사도 속수무책이었다. “이주한지 1년 후부터 죽기 시작했어요. 심장마비나 뇌졸중, 암에 의한 죽음이죠. 이 세 가지가 이주민들의 주된 사망원인이었어요. 심지어 매주 장례식이 치러졌던 때도 있었어요. (다찌아나, 코바린 주민)체르노빌이 겪은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1세기의 첨단 과학은 원전사고의 후유증을 완벽하게 치유하는 데 그만큼 무기력했다.
이홍기·독립PD | media@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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