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7일 일요일

“나, 방송이 나간 뒤 왕따가 됐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3-16일자 기사 '“나, 방송이 나간 뒤 왕따가 됐다”'를 퍼왔습니다.
[서평] 언론에 당해 봤어?/ 언론인권센터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2013년 2월

20대 여성 이진애씨(가명)는 2008년 케이블채널 앨리스TV (정재윤의 작업남녀)에 출연한 뒤 ‘왕따’가 됐다. 이씨는 지인으로부터 젊은 남녀의 연애를 실제상황인 것처럼 연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출연료 명목으로 20만 원을 받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제작진은 얼굴 모자이크, 음성 변조를 약속했다.

제작진은 이진애씨에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만큼 실제인 것처럼 연기해 주면 된다”면서 “남자 쪽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이니 너는 절대 눈치 채지 못하게 연기해 주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강남 논현동 먹자골목, 당구장과 노래방에서 연기했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제작진은 그에게 더 심한 스킨십을 요구했다.

2008년 8월 중순 이진애씨는 애인과 함께 방송을 시청했다. 프로그램의 첫 자막과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았다. “국내 최초원나잇 스탠드 실험 프로그램!”, “100% 실제 상황 작업 테스트!!”, “이성을 호텔 룸까지 데리고 오라.” 알고 보니 이 프로그램은 ‘선수’ 남성출연자들이 헌팅한 여성을 유혹해 호텔로 먼저 데려오고, 제작진은 이긴 남성에게 상금을 주는 포맷.

문제는 모자이크와 음성변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진애씨의 지인, 대학 동기들이 눈치를 챘다는 점이다. 2008년 2학기 개강 시기, 이씨는 대학동기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려졌다고 느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동료에게서는 “너 맞지?”, “쓰레기”라는 말을 들었다. 문방구용 칼로 손목을 그은 적도 있다. 이듬해 휴학을 하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일했지만 금방 그만 두고 말았다.

결국 이진애씨는 언론인권센터를 찾아 제작사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법원은 손해배상금 650만 원에 화해를 권고했고, 이씨는 수용했다. 언론인권센터(이사장 남성우)가 이씨처럼 언론에 당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책 에 담았다. 사례는 총 16개로 가해자는 신문, 방송, 통신심의 등으로 다양하다.

이 책에는 통일부 추천도서가 용공서적인 된 사연, 제자의 죽음을 두고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해야 했던 교사의 이야기, 2004년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쓰레기 만두’ 보도의 전말 등이 담겼다. 언론의 선정적인 편집,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취사선택, 부주의한 사실관계 확인으로 사람이 죽고 있다. 그래, “당하지 않으면 모른다.”


정발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장은아씨는 2008년 6월 제자를 잃었다. 그가 담임으로 있던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중 한 학생이 돌연 쓰러졌고, 병원은 ‘뇌혈관이나 심장혈관의 기형에 의한 돌연사’로 추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무료신문 ‘메트로’은 칼럼 (금쪽같은 내 새끼야)를 게재했다. 

내용은 이랬다. “평소 말썽을 피우던 학생이 전날 과음을 하고 조퇴를 신청했지만 담임이 허락하지 않고, 보건실도 문이 닫혀 있었다. 응급처치를 할 줄 아는 교사가 없었다.” 이 칼럼을 쓴 최아무개씨는 “어찌 보면 그 학생은 지독히 운이 없었다”면서 “담임교사가 조퇴만 하게 해주었더라도, 양호 교사가 3교시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았더라도 그 학생은 목숨을 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파장은 컸다. 학생들과 학부모가 이 칼럼을 읽었다. 장은아씨는 언론인권센터와 함께 소송을 준비했고, 결국 승소했다. 이 과정에서 메트로와 최아무개씨는 칼럼을 쓰고 게재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칼럼니스트의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는 학생으로부터 사망한 학생과 관련한 소문을 들었는데 아내를 믿는 만큼 그 내용을 신뢰했고, 칼럼은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 확인 없이 작성될 수 있다.”

장은아씨는 이 책에서 “승소로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면서 “정정기사는 났지만 그 원래 칼럼을 읽은 사람들 중에 얼마나 그것을 보게 됐고 1년이 지나서 난 정정기사를 원래의 기사와 연결해서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저는 그 엉터리 칼럼의 주인공에게 사과도 받지 못했고, 아직도 그 녀석을 보냈던 날을 곱씹어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다”고 썼다.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는 심영섭 박사는 지난해 나주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를 “불량식품”이라고 비판했다. 심영섭 박사는 한국 언론이 취재기간이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범죄보도를 피하고,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로 선정적인 보도를 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찾기 위해 몇 년 전 도시괴담을 우려먹기도 하고,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않고 피해자를 만든다. 

언론은 종종 가해자가 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수백만 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사과는 소송이 완료되고 수개월 뒤 지면 한 귀퉁이에 실린다. 이 책은 언론에 당했고, 당할 위험이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해자 언론의 민낯이기도 하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했지만, 당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이 책을 기자들에게 권한다.

박장준 기자 | weshe@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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